겨울 영주산(瀛洲山) 산행기

瀛洲山

by 무량화


이름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영주산이다.

한라산을 제치고 당당히 명함을 내민다.

나 영주산이야!

그럼에도 우쭐 뻐기기보다는 나지막 겸손하게 부복해 있다.

겉보기엔 여느 오름만큼이나 평범해, 과연 무엇을 품었기에 그 대단한 이름을 차지했을까 싶을 정도다.

산행로 들머리를 비스듬 휘돌아 동쪽 언덕길 약간만 걷다 돌아서보면 절로 탄성이 터지기 시작한다.

천국의 계단 나무층계 오르면서도 내동 뒤돌아서 동쪽해안과 남쪽바다를 조망하게 만든다.

우도와 일출봉이 떠오르는가 하면 표선 앞바다가 푸르게 펼쳐진다.

한눈에 지구가 둥글다는 게 짚이고도 남는다.

이처럼 아예 뒤돌아 서있게 만드는 망권이라는 비범함을 품은 영주산이다.

그만큼 눈 맛 시원한 오름이다.

걸음걸음 연신 자동발사되는 감탄사.

층층 계단이 산정까지 이어진 듯 계속되나 완만한 경사로라 무릎에 과한 부담은 주지 않는다.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 끄트머리 짬에 도반을 세워놓고 사진에 담는다.

모처럼 대기 맑아 청푸른 하늘 눈부시다.

아마도 우리 모두 언젠가 돌아가는 본향, 그곳은 저처럼 아름다워 빛의 이끌림 따라 들어가게 되리라.



영주산은 실측 높이나 산세보다 정신적 좌표로서의 상징성을 지닌 산이다.

실제의 산이기보다, 제주를 머나먼 이상향으로 바라보던 옛사람들의 생각이 만든 산이기도 하다.

영주(瀛洲)에는 제주가 오래도록 품어온 역사와 사유의 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고대 중국에는 바다 한가운데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영주산이다.

이처럼 도교적 상상 속의 신선 사상에서 나온 말인

‘영주(瀛洲)’라는 말의 뿌리에는 현실과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속세를 벗어난 불로장생의 땅이라는 도교 최고 지향점이자 이상향에 맞닿아 있는 영주(瀛洲)다.

무한대의 서사를 갈무린 영주산의 초월성이라니.

옛 문헌과 지리지에 "제주는 동쪽 바다의 영주와 같다.
신선이 노닐 만한 땅이다" 란 기록 남길 만도 하다.

오래 그렸으면서도 산행 미뤄왔던 영주산이다.

옛부터 오죽 신성시했으면 '영모루'라고도 불렸을까.

어쩌면 소중히 간직하고만 있으면서 무척 아껴뒀던 장소, 그래서 일기 청명한 날 택해 오르기로 작정한 것.

나는 초행이지만 동행한 황선생은 오래전 영주산 둘레길을 걸어봤다는데 길머리 약간 헷갈리는 듯.

표선 성읍 삼거리에서부터 도로앱을 열어놓고 봉긋 솟은 푸른 산 마주 보며 걸었다.

한라산에서 발원한 천미천 폭넓게 이어졌다가 집 몇 채 안 남은 부락을 지나치기도 하였다.

도로변 상가며 식당은 주말인데도 문이 닫혀 너른 주차장은 텅 빈 채. 단체손님으로 문전성시 이룬 시절은 애진작에 끝난 듯 분위기 황량스럽다.

비슷하게 쇠락한 민속마을이 연달아 나타났다가 물러선다.

큼직한 선돌에 영주산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 곳에서 커브를 틀자 승마 연습장과 푸르둥둥한 무밭이 곁을 따른다.

이삼십 분 걸었을까, 저만치 새하얀 풍력발전기 돌아가더니 풍경 바뀌어 아늑한 숲길 그리고 영주산 초입이다.

시든 풀 눗누렇게 누워있는 언덕을 바로 오르기 시작했다.



천국의 계단이 끝나자마자 볕 다사롭고 평온하던 날씨 돌변해 엄청 기갈 센 바람이 마구 몰아친다.

소리 윙윙거리며 전신 휘감아도는 바람에 정신 못 차릴 지경인데도 목전의 풍경만은 폰에 담는다.

타르초가 휘날리는 설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에.

티베트 불교의 철학이 담긴 오색 깃발, 히말라야의 푸른 하늘과 하얀 설산 고갯마루에서 휘날리는 색색의 깃발 느낌 무척 강렬했으므로,

청색은 하늘 (Sky)로 건강과 장수, 백색은 구름 (Cloud)으로 정화와 청결, 적색은 불 (Fire)로 에너지와 열정, 녹색은 물 (Water)로 평화와 자비,
황색은 땅 (Earth)으로 풍요와 결실을 상징한다고.

가본 적 없지만 사진으로는 많이 접한 히말라야 설산의 이색진 정경이 산행팀의 오색 기념 리본 묶음들에 오버랩된다.

그 길목을 지나자 저만치 산불감시소가 서있고 산아래 북쪽에 물살 새파란 호수 선연히 드러난다.

수산못인가 싶었는데 성읍저수지란다.

물바람까지 가세해서인지 시립도록 차디찬 칼바람결.

냉기에 쫓겨 옹송거린 채 걷다가 고개를 들자 비로소 한라산 웅자가 뭇 오름 자애로이 거느리고 기다린다.

장엄천지, 감탄사조차 부질없어져 가만히 합장배례 올린다.

여기 이르도록 불러주시고 이 시간 허락해 주심이 감사해서다.

아무리 마음이 굴뚝같아도 건강이 따르지 않으면 다 소용없기에 또 거듭 감사.

정상인 해발 326m에 올라서면 이처럼 시야가 확 트인다.

사방으로 확보된 조망권.

한라산 사라오름 지미오름 개오름 따라비오름 물영아리오름 민오름 아부오름 거슨세미오름 돌오름 백약이오름 용눈이오름 대록산 소록산 수산봉 지미봉 두산봉 성산일출봉 등등....

중산간의 오름 군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상향의 중심에 있는 산 영주산 산정에서 빙 둘러보면

푸르스름한 윤곽에 싸인 여러 오름들이 울멍줄멍 솟구쳐 마냥 바라보고 싶다마는.

전망에 취하고 추위에 놀라고, 그 바람에 말굽형 분화구 생각은 아예 잊어버렸다.

서둘러 서쪽으로 난 하산길에 접어든다.

경사 가파르나 길에 깔린 두툼한 야자매트가 안전을 지켜줘 소나무 숲을 거쳐 삼나무 숲 지나서 드디어 원점으로 회귀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산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