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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2. 2024

그 자리에 언제나 그 모습으로

부산 구석구석

내가 그를 만나러 가는 길목에는 한적한 주택가가 있다. 그곳은 집집마다 정원이 꽤 근사하다. 상록수림 새새 冬木이 寒空 배경으로 추상화를 그리고 선 겨울 지나 봄날의 그 골목길엔 목련이 눈 내리듯 한다. 유월 장미는 황녀처럼 호사스러웠는가 하면 염천에 더욱 붉게 피던 석류꽃 송이송이. 생활의 먼지를 털고 화목과 더불어 고운 마음으로 그를 만나러 가라는 어떤 고마운 배려 같다.


부산 박물관에 그는 늘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다. 언제 보아도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그 모습으로 나를 맞아들이는 그. 정녕 믿음직스럽고 미쁘다. 무덤덤하면서도 유정하고 또한 변덕이 없는 의젓함이 든든한 것이다. 촐랑거리는 경망 같은 건 추호도 없다. 더구나 분 냄새로 단장하고 환대하는 경박 따위도 없다. 결코 가벼이 아부하거나 섣불리 웃음 짓지 않는 진중함. 마치 굳은 심지로 묵묵히 인고를 삭힌 장년 여인 같은 안존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그.


선사실, 가야실, 신라실을 거쳐 제3 전시실이 도자기들의 방이다. 도자기실에는 분청이며 청자가 있고 백자도 있다. 그중 유독 나를 이끄는 것이 바로 백자 大壺이다. 어쩌면 이 탐닉도 내 성정이 두루 너르지 못한 소이일 터이다. 게다가 나는 아주 큰 것 아니면 자잔한 것에 애착이 간다. 이를테면 꽃 중에도 훤칠한 연화이거나 조촐한 들꽃이 좋듯이. 이것은 본래 나다운 치기와 함께 닿을 수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적인 것에의 턱없는 흠모이리라.


입 부분이 넓고 낮은 목. 풍만한 가슴 아래 서서히 조여드는 매끄러운 선의 흐름. 백자대호는 이름 그대로 그냥 백자 그릇이라 분류하기엔 너무 크다. 거의 희멀쑥한 항아리에 가까운 백자라 달 항아리라고도 부른다. 그렇다고 왕실의 태 항아리는 아니다. 단지 장식용이었는지 용도가 모호하지만 굳이 족보를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무심히 아주 무심히 두둥실 떠오른 달과도 같은 백자대호. 표면에 그림이 그려 있거나 조각이 든 것도 아니다. 여백의 고요가 주는 안식과 더불어 원만한 곡선과 넉넉한 품이 마음까지 푸근하게 만들어 주는 백자대호. 천상 그것은 사대부 집 정경부인의 기품이다. 그렇다고 서슬 퍼런 고고함이 아니라 후덕하기로야 황희 정승 같은 청백리의 배필이셨을.


조선조 18세기 작품이라는 설명서를 보면 떠오르는 게 있다. 서민들의 생활 모습을 풍속도로 남긴 단원과 동시대다. 귀족 문화에서 평민 문화로의 전이기였을까. 간결하고 순순함으로 오히려 아름다운 조선의 백자. 어찌 보면 평범하기 짝이 없으나 그 소박함이 친근감을 준다. 날렵하니 귀티를 풍기는 청자와는 사뭇 다르다.


더구나 이 백자대호는 백자 중에도 무미건조할 정도로 장식적인 꾸밈이 전혀 없다. 용 무늬나 모란을 품은 바 없고 비단 깃이기보다 잘 다듬은 무명의 질감을 가진 백자. 거칠지만 야성적도 아니며 질박하나 조금도 천하지 않다. 또한 빼어난 미태거나 암팡진 맵시도 없다. 물론 이 백자대호는 지정문화재도, 국보급 보물 역시 아니다. 그렇다고 주눅 들어 기 꺾인 바 아닌 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에, 자리에 순명하는 그 담담한 자세라니.


나도 백자처럼 본래 주어진 그대로에 자족하며 의젓하게 살고 싶다. 서두름 없이 느긋하니 의연하고 주춤거림 없이 당당하고 오종종함 없이 매사 너그럽게 살고 싶다. 내 일상에 접목시켜보고 싶은 그 훤하고 시원스러운 모습 하며 보름달빛 닮은 흰빛은 어디 또 예사롭던가. 분명 이 백자는 도공의 기도가 스민 정화수에 보름달빛 녹아들었으리. 거침없이 내리부은 백색 유약으로 하여 파르스름 젖은 달빛. 보름달 중에도 희다 못해 달빛 푸르른 백중날 밤의 달빛이다. 그렇다. 정월 대보름달이거나 한가위 달은 아니다. 즐기기 위한 달이 아닌 秘願을 띄우는 달, 백중날의 달.


백자대호, 그 앞에 서면 너른 가슴에 내 모습이 안개 속이듯 얼비친다. 은은한 영상으로 떠오르는 부드러운 실루엣. 나는 이 순간을 맞기 위해 자주 그 앞에 서는지도 모른다. 거울에 비치듯 얼굴의 티 하나, 잔주름 실낱마저 놓치지 않고 드러내는 정명함이 아니다. 누군들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노출에 약간의 저항 같은 걸 갖고 있지 않을까. 얼마쯤 은근스레, 반투명의 미묘한 뉘앙스로 피어나는 약간은 신비스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건 오직 여기에서 뿐이다.


달개비나 망초 같은 풀꽃 무리와 봄비 오는 날의 우수, 혹은 꿈길에서 느끼는 아스라한 환상미. 더러는 자신에의 도취도 가져볼 일이다. 늘, 시린 손 데워지지 않아 안타깝고 물기 메말라 못마땅했던 자신에게 이처럼 관대해지고 심지어 매료되어 보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니까. 한동안 백자에 취하고 또 한참은 백자에 얼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는다. 밖엔 사계가 순환하며 오가지만, 한낮이거나 노을녘이거나 상관없이 늘 같은 조도의 불빛 아래 나를 기다리는 그. 근처의 조그만 연적이나 도자기는 내 것으로 갖고 싶은 탐심을 일군다. 이것이 시도 때도 없이 발동하는 끈끈한 소유욕이라면 백자대호에 대한 대접은 격이 다르다. 수용이나 포용이 아닌 기꺼운 헌정 또는 귀의 같은 것.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족하다. -1987-


울창한 숲에 터널이 뚫리고 농지 위로 고가도로... 산천도 예전 그대로가 아니더라는.

조밀하게 치솟은 아파트 천지라 익숙했던 도회의 스카이라인 무진 변했더라는.

친근한 마실터였던 부산박물관, 목련화 반기던 들머리 동네부터 옛 흔적 찾을 길 없고..

통째로 리모델링 거쳤다는 박물관 실내외 모두 예전 모습 간곳없어져 아주아주 낯설더라는.

세월만 무심히 흘러 흘러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버린 이십여 성상 그 이전,

언제라도 박물관에 들어서면 입구 벽면 가득 채우고 기다려주던 '반구대 암각화 탁본'도 자취 감췄더라는.


높이 4미터 너비 10미터에 달하는 국보 285호, 고래 헤엄치고 뭇 짐승 뛰어다니는 반구대 암각화 탁본.

너무도 아쉽고 그리워 안내 데스크에 물어봤으나 젊은 여직원 고개만 갸우뚱, 일면식도 없노라 하네.

고대실을 거쳐 철기실에 이르면 대성동 고분 발굴 시에 본 철제 투구며 말안장 녹슨 채 걸려 있었는데....

도자기실에 들면 청자연적, 분청 필통, 심지어 조선시대 백자 서안도 있었는데....

허전한 마음으로 미적거리며 돌아 나오다 기증품 전시관에서 만난 그 옛적 그대로인 달항아리,

쓸어안고 싶을 만큼 너무도 반가워 눈가 그만 매워지더라는.

 옛 흔적 가뭇없어진 박물관, 그냥 갈까 그래도 아쉬움에, 다시 또 한 번....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말 그대로네.


80년대의 모습은 박물관 외양뿐 전시실 구조나 내용 거의가 옛 모습 찾을 길 없네.


사라진 것에 대한 애틋함인가, 모래알 서걱대듯 건조한 감회만 맴도네.


추세가 그러해서인지 고고학적 유물 전시보다는 격동하며 부침 심했던 근세 역사관에 가깝게 변했네.


일제 강점기 흔적들과 육이오 거기다 오일팔에 관한 자료가 다수라 어리벙벙.


예전에 느꼈던 호젓한 분위기 간곳없어 정나미 떨어질 정도라 전처럼 자주 찾을 거 같지가 않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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