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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3. 2024

수원 화성에서의 봄날 하루 -1

원래 목적지는 화성행궁이었다.

한중록의 혜경궁홍씨와 정조대왕인 아들 이산이 거닐었다는 행궁의 뒤뜰이 보고 싶었다.

수원 화성은 얼떨결에 내린 곳이다.

네비 따라 수원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차는 계속 달리는 중인데 성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군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잔디밭에서 웅성대고 있었다.

여긴가 봐요! 승질 급한 내가 소리쳤다.

아직 덜 왔는디....그럼 내려봐.

우르르~ 세 할머니가 급하게 내렸다.

찻길이라서 느긋하게 정차할 수가 없으니 서둘러 빨리 하차해야 했다.

구불구불 이어진 성곽에 웅장한 성루와 누각, 그런데 궁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수원 화성(水原 華城)은 성문, 누대 등 건축양식이 기능, 미관, 실용성을 두루 구비한 조선 건축물의 상징이다..

수원 시내 한복판에 솟은 팔달산을 중심으로 길이 5.7km에 걸쳐 펼쳐진 성곽인 수원 화성.   

망루의 일종인 공심돈(空心墩), 대포를 둔 포루(砲樓), 요충지에 세운 각루(角樓), 군사지휘소인 장대(將臺) 등을 모두 갖췄다.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3호로 지정되었다.

정조 개혁 정치의 참모인 채제공이 축성의 총지휘를 맡고, 정약용이 전 과정을 계획•감독한 수원 화성은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성을 축조하며 최대한 지형과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100m 간격으로 40여 개 방어 시설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화성은 백성이 살 수 있는 읍성과 방어를 위한 산성 역할을 동시에 했다.

또 하나 특기할 점은 조선 최초로 돌과 벽돌을 사용해 과학기법으로 쌓은 성이라는 점이다.

화성의 4대문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은 벽돌을 사용했으며 성벽의 몸체는 화강암을 사용했다.

사대문인 장안문(북), 팔달문(남), 창룡문(동), 화서문(서)이 있는데 이 중 북문인 장안문이 화성의 정문이다.

정조가 서울에서 수원으로 올 때 가장 먼저 성안으로 들어오는 문이기 때문이다.

화홍문 근처에 지은 방화수류정과 용연은 가장 풍경이 아름다운 곳.

선대들은 용지에 비친 달을 감상하는 낭만을 수원팔경의 하나로 선정했다.

낭만 어린 이 장소는 화성 이야기 중 두 번째로 다루기로 한다.



정조 개혁 정치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수원 화성.

탕평정책을 통해서 분열된 정치권을 통합하고 개혁정책을 실현해 나가고자 신도시 화성 건설에 총력을 기울인 정조.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하기 위해서였다.

화성 건설은 사도세자에 대한 명예 회복이란 뜻도 담겨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참담하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는 애끓는 효심의 발로인 화성 축조.

동시에 자신의 개혁 의지가 담긴 신도시, 오래 꿈꿔온 이상적인 도시를 건설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조선조 궁중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라면 단종을 들겠지만 정조 역시 온갖 파란을 겪었던 인물.

효성 어린 그가 아버지를 위해 화성을, 어머니를 위해 행궁을 지어 바치게 됐던 통한의 세월이 응축된 곳.

어쩌면 화성을 먼저 찾는 것이 순서상으로도 그렇고 이치에도 맞겠다.

그럼에도 화성은 주마간산 격으로 스치고 말았는데, 세상만사 역시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며 경험한 만큼만 안다.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불쑥 찾은 화성이기도 하지만 행궁에 갈 생각으로 가득 차 그저 지나가는 풍광이었던 화성.

당시 찍은 사진을 훑으며 정보 검색을 하다 보니 화성 또한 굉장한 가치를 지닌 유적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복원시킨 역사유물에 대한 나의 섣부른 선입견은 단숨에 부서지고 말았다.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화성 공사가 끝난 1796, ‘화성성역의궤’라는 공사 보고서가 활자본으로 제작됐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가 화성 성곽을 축조한 뒤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인 정조 시대, 권수(卷首) 1권, 본문 6권, 부록 3권을 합해 총 10권 9책으로 구성된 의궤.

정조의 총지휘 하에 만들어진 화성(華城)은 이 덕에 훗날, 조선시대 성 중에서 가장 복원이 잘 된 건물로 꼽히게 된다.

1794년 축성에 들어간 화성 건설,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만 명이었고 공사비는 80만 냥에 달했다.

그러나 5년으로 예상됐던 공사 기간은 절반 수준으로 대폭 단축됐다.

공사에 참여한 모든 이에게 후한 품삯을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통에 수원 화성은 크게 파손되었으나 <화성성역의궤>가 있어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

화성성역의궤가 남아있지 않았다면 수원 화성은 유네스코로부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을 터였다.

개혁이 절정으로 치닫던 재위 24년 되던 해인 1800년, 그러나 갑작스레 정조는 눈을 감는다.

세계 곳곳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격동기였던 당시.

조선도 바야흐로 변혁의 시기였으나 정조 이후 역사의 발걸음은 아쉽게도 거기에서 멈춰 섰다.

선진문물을 도입해 근대로 향하려던 개혁군주의 꿈은 좌절되었으며 어린 왕 순조대에 이르러 당쟁은 더욱 고착되고 말았다.

정조가 좀 더 집권했더라면 그의 청사진대로 개혁은 완성되었을까?

 

두둥실 열기구 솟아오른 봄하늘 푸르렀으나 황사로 대기의 질은 별로다.

그래도 성 주변엔 소풍 나온 유치원생 삐약대는 병아리 떼 같았다.

현장학습 마친 고딩들은 진작에 빨간 버스를 타고 떠났으나 성터엔 여전히 상춘객 이어졌다.

성곽이 있는 멋진 둘레길을 알게 된 우리는 걸어서 행궁까지 가기로 했다.

사철 꽃이 피는 푸른 섬에 살면서도, 대도시 바로 옆에서 누릴 수 있는 여유로운 산책길 부럽기도 했기에.

근자 한국은 어디나 잘 가꿔진 꽃길이요 어딜 가도 훌륭한 절경지 뿐이다.

이 모두는 그 속에 들어가 오롯이 누리고 즐기는 자의 것!

신록 눈부신 오월엔 특히 누구라도 집밖으로 나서볼 일이다.



 

 

 

 

 

동북각루(방하수류정)

 

사적 제3호 북암문을 지나면 풍광 아름다운 용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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