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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0. 2024

52년 만에 처음으로 맛본 생일 미역국


인구가 6백만이 되지 않는 작은 나라.

국토 면적도 불과 4만 3천㎢ 정도이다.

인구는 한국의 9분의 1 수준, 면적은 한국의 절반 정도이나 국민소득은 곱이 되는 덴마크라는 나라.

우리에게는 안데르센 동화로 더 잘 알려진 나라이다.

덴마크에서 온 그녀 이름은 수잔.

매우 착잡한 기분인 그녀가 제주로 여행을 갔는데 만나거든 따뜻하게 허그해 주라는 부탁을 조카가 특별히 해왔다.

기막힌 사연을 듣고 보니 가슴이 먹먹했다.

아암! 여부가 있나, 만나서 꼬옥 껴안아주고말고.

더구나 그녀는 71년생, 조카딸과 우리 아들과도 동갑내기이다.

그래서인지 더욱 마음이 짠해졌다.

조카는 몇 해 전부터 해외입양인 부모 찾기를 도와주는 배냇이란 모임을 꾸려왔다.

우연찮은 인연으로 미국인 친구의 생모 찾기에 홀로 발 벗고 나섰던 그녀다.

그 일 이후, 도움 자청한 주변 친지들과 의기투합해 '해외 입양인 친부모 찾기'에 도움주기 위한 본격 행보에 나섰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점차 사회 각층의 관심과 성원받으며 지금은 정부 산하 기관의 지원도 약간 나오므로, 가일층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예약해 둔 숙소가 마침 서귀포성당 인근, 도착 다음날 7코스 올레길을 걸었노라는 그녀를 만나 저녁을 함께 나눴다.

한정식을 골랐는데 의외로 젓가락질이 아주  유연했다.

어렸을 적에 가라데를 배워 그때부터 젓가락질을 할 줄 알게 됐다고 한다.

돔베 고기를 상추에 싸서 먹기도 하고 맵싸한 된장찌개며 김치며 오이무침도 스스럼없이 떠먹었다.

옥돔구이 살점을 발라주었더니 아주 맛나게 먹었다.

내일이 생일이라며?

예스! 밝게 웃으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일해야 하니 오후 다섯 시 우리집에서 생일 파티를 하자.

와우! 고마워요!!

당연히 서구인 사고방식대로 그녀는 더욱 환한 표정을 지으며 흔쾌히 대답했다.

식사 후 카페 거리를 지나면서 커피 어때? 라며 그녀를 바라봤다.

오후 시간에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잔다기에 비가 부슬거리는 솔동산 그녀 숙소 앞까지 동행해 주고 귀가했다.

 

이튿날 일을 마치고 부랴사랴 오느라 아무 생각 없이 내달려 집 앞에 거의 당도했을 즈음이다.

마주 오던 여인이 반가이 손을 흔들며 다가와 담싹 안겼다.

세상에나! 그녀 수잔이었다.

올레 6코스를 걷겠노라 한 그녀가 중앙 로터리에 있을 턱이 없어서 어쩐 일이야? 물을밖에.

아침부터 비가 질척대기에 하영올레로 걷기 코스를 바꿨다며 서귀포시 청사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청사 앞에 있는 스탬프를 찍으러 가는 중이라면서 그녀는 분홍색 하영올레 카드를 펼쳐 보였다.

여기가 우리집이니 일단 올라가자, 나도 시청 앞을 지나 홈플러스로 장 보러 가야 하니까.

감귤차 한잔 마신 다음 우린 급히 밖으로 나와, 나란히 시청 쪽으로 향했다.

걸으면서 이런 우연이 있나, 참 인연도 특별하구나, 미라클 같은 단어를 서로 주고받았다.

시청사 앞에서 하영올레 카드에 스탬프를 꾹 누르고 나더니 그녀는 오늘의 만남을 기념해야 한다며 셀카를 찍었다.

바짝 들이댄 셀카가 겸연쩍어 싱긋 웃고 말았다.

다섯 시 약속 시간이 되면 직접 찾아오라 이르고 나는 장을 보러 북쪽으로, 그녀는 숙소에 가 샤워하고 오겠다며 남쪽으로 걸어갔다.

 

한국식 생일파티의 주역은 미역국이다.

보글거리며 끓는 새카만 미역국 냄비를 그녀가 들여다 보기에 한국인은 생일날마다 이 국을 먹어, 그랬다.

자세한 미역국의 유래는 번역기를 돌려 들려줬다.

한국 음식 골고루 마련해 전통 생일 상차림을 하기엔 바쁘기도 하고 단출한 살림에 그릇도 부족해 손쉬운 샤브샤브를 준비했다.

우리 둘만 조촐하게 생일 파티를 하기보다는 여럿이 모여 왁자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어 이웃들을 초대했더랬다.

그러나 옆집 황선생 외에는 다들 영어 울렁증이 심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황선생이 도울 게 없냐 하기에 밥 한솥을 부탁했더니 밥솥과 호박찜 반찬을 갖고 왔다.

때마침 아래위층 이웃에서 준 총각김치 배추김치 겉절이만 내놓고 저녁을 먹으며 셋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52년 만에 처음으로 생일이라며 미역국을 다 먹어본다면서 국그릇을 알뜰하게 비웠다.

그 말이 어찌나 찡하게 들리던지 울컥해지는 바람에 얼른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상을 대충 치운 다음 케이크를 올렸다

생일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해피버스데이 투 수잔! 노래도 부르고 맥주로 기분도 냈다.

고맙게도 시간을 내준 황선생이 우리 둘에게 포즈를 취하라며 사진으로 남겨줬다.

수잔은 소녀처럼 티 없이 순수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노티 폴폴 나는 난, 마치 연출한 듯 하얗게 늙은 어머니 역으로는 아주 적격자였다.

그녀가 오면서 사 온 붉은 꽃 화려하게 핀 앤슈리엄 화분이 조연으로 자리를 빛내 주었다.

꽃 선물을 들고 방문한 그녀, 내 딴엔 향수를 선물로 준비했으나 미처 포장을 못해 이날 전해줄 수 없었던 점이 옥에 티.

전에 향기 연구소에 가서 직접 향을 골라 조향한 향수로 포장도 세련돼 누구에게 선물할까 했는데 바로 수잔을 위한 향수였구나.



그녀를 만나보기 전까지는, 참으로 심난스러운 시추에이션인데 어찌 대처해야 하나 난감했었다.

친모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외국으로 입양됐노라 여겼다던 수잔이다.

지난 정월에 눈 쌓인 피레네를 넘어 카미노를 걷던 중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산티아고로 향하는 한국인들과 동행하게 되었다.

그들로부터, 해외로 나간 입양인이 부모 찾기에 나서는 경우가 많으며 성사되는 확률도 높다는 정보를 듣게 됐다.

돌아와 유전자 검사(해외 입양인들이 친부모를 찾고자 구강 내 유전자 검사를 하여 검사 정보를 올리는 사이트가 있음)를 했다.

이를 통해 미국에 사는 사촌과 연결이 되었다.

엄마가 한국인인 사촌에 의해 한국에 자신의 생모가 생존해 있음을 확인하자 그녀는 친모를 속히 만나고 싶어 마음이 들떠 올랐다.

자신이 지닌 유아기 때의 여권으로 해외입양기관을 연결해 엄마와 선이 닿았다.

그렇게 52년 만에 생모를 찾았으며 막상 한국에 왔지만 친모는 만남을 거부했다.

와락 끌어안아 보거나 손 맞잡아보기는커녕 얼굴만 한번 보고자 한 소망조차 끝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박절하게 내쳐진 그녀.

원래 알기로도 내 친엄마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덤덤하게 말했으나 그 순간이야말로 까마득한 절벽으로 곤두박질친 듯한 절망감으로 죽을 맛인 채 정말 기분 엉망진창이었을 터다.

그녀는 나름 자신의 생일을 전후해 생모를 만날 플랜을 세우고 일정을 조율해 한국으로 날아왔던 게 아닐까도 싶었다.

하지만 다 허사, 속절없이 만남의 기대는 물거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조카로부터 수잔을 만난 자리에서 입양에 관한 화제는 피하는 게 좋겠다는 말도 들었는 데다 내 영어로야 그런 주제를 다룰 재간도 없었다.

헌데 그녀가 먼저 내게  민감하고도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한국에서 해외로 입양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고.

솔직히 나 살기에만 급급, 그런 면에 도통 관심도 없었다.

사실 해외입양은 전쟁통에나 있을 법한 사안, 50년대 한국이라면 모를까 그 외 정황은 일반인은 까맣게 모른다.

입양인 문제를 다뤄온 조카에게 들어보니 한국의 산업화 시대와 맞물리는 칠팔십 년대가 시기적으로 피크였다는 정도는 알았다.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 공장이 핑핑 돌아가며 처녀들은 도시로 몰렸고 음지 독버섯처럼 성이 상품화됐으며 순결 관념은 희박해졌다.

그 통에 양산된 것이 미혼모, 실수로 태어난 혼외자나 키울 능력이 없는 부모를 만난 영아는 태어나자마자 곧장  버려졌다.

미안하지만 난 그 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고 짧게 답했다.

그는 약간 격앙된 목소리로 물경 25만 명이 입양돼 한국을 떠났다며 더 놀라운 얘길 이어가는 거였다.

현재 덴마크에는 한국에서 태어난 입양인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내게 재차 물었다.

생후 7개월 아기 때 유럽행 비행기에 태워졌다는 그녀.

덴마크에는 9천 명의 한국인 입양인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팔려온 거라고 말하는 그녀 음성에는 미세한 분노가 실려있었다.

25만 명의 입양인에 대해, 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진심 아엠 쏘리~ 쏘쏘리! 라 했는데 여기 이르자 말문이 탁 막혔다.

고 조그마한 나라에 한국인 입양인 숫자가 그리 많다니 어이없는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한국동란 이후 홀트복지회 통해 미국으로 입양 보낸 케이스는 들어봤지만 덴마크, 네덜란드, 스위스 등 유럽 국가로도 그리 많이 보냈다니.

현재 DKRG(덴마크 한국인 진상조사 그룹)란 단체가 한국 정부에 해외입양 실태조사와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을 적극 벌이고 있단다.

해외입양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 또한 서구 몇 나라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범국가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고도 하였다.

과거 ‘고아 수출국’으로 불렸던 한국의 해외입양 흑역사의 시작은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그러나 오십 년대나 육십 년대 해외입양 숫자는 몇 백 명에 불과했다.

칠십 년대부터 이천 년대 초까지가 물경 천 단위, 그중에서도 87년도엔 근 8천 명의 아이들을 전세기 띄워서까지 해외로 내보냈다.

한국인들은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둘 것이 못 된다'며 내 핏줄이 아닌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아이를 입양할 의향이 전무했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보면 해외입양은 출신국에서 아동을 보호할 수 없는 최후의 조치로서만 허용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가난을 벗어나 잘 살아보고자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며 총력전을 펴던 국가로서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민간 입양기관과 함께 정부는 잉여 물자 처리하듯 해외입양을 적극 장려하며 조직적으로 아이들을 외국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부강한 나라였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비극이 다반사로 벌어진 당시의 한국.

입 하나 덜어야 숨 쉴 만큼 살림이 궁핍했거나 아이를 도저히 돌볼 형편이 아닌 처지라 버린 모정, 가난한 나라 역시도 방도가 없었던 것.

누구를 탓할 것인가, 시대를 잘못 만난 죄로나 돌릴밖에는.


두 번이나 엄마로부터 철저히 버려진 그녀다.

그 속내가 과연 어떠할지는....

일부러 괜찮은 척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괜찮은 심사일 수만은 없는 참담한 정황이다.

돈 워리! 그 대신 내겐 덴마크에 좋은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녀가 아주 씩씩하게 말했다.

기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걱정부터 앞섰으나 한마디로 기우였다.

밝고 맑은 그녀 얼굴에는 한 점 그늘진 구석이 없었다.

그녀가 보여준 양부모님 내외분 사진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두 분 다 모습에서 더없이 인자하고 후덕한 인품이 풍겨 나왔으며 형제자매들 분위기도 매우 다사로웠다.

부모와 모국을 떠나 살게 됐었지만 그래도 난 러키한 케이스였어.

스웨덴 노르웨이와 동일 문화권이다시피 한 덴마크의 사회복지 시스템 역시 최상급이다.

대학까지 무상 교육이라 공부에 뜻만 있다면 누구나 원하는 만큼 학문에 정진할 수 있다고 하니 지상낙원에서 산 그녀가 아닌가.

좋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받고 잘 자라 덴마크의 반듯한 시민이 돼 24세 딸을 둔 그녀.

이혼했다는 말도 차 한잔했다는 정도로 심상하게 말하는 그녀는 외모만 동양인일 뿐 이성적인 서구인이었다.

생모와의 만남이 불발로 그쳤을 당시야 큰 충격이었겠지만 하루 이틀 자신을 추슬러 원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그녀.

정녕 그녀의 강단진 정신세계와 단단한 마음 근육은 칭찬받아 마땅할만했다.

수영을 몹시 즐긴다는 그녀는 다음날 스킨 스쿠버에 도전하려고 미리 예약을 해뒀다기에 일찍 자리를 파했다.

올레시장까지만 배웅을 해주고 돌아와 뒷설거지를 하면서도 기분은 영 묵지그레했다.

해외입양인들이 뿌리를 찾아 돌아오면서 여러 문제점들이 적나라하게 노정되고 있는 작금이다.

수잔의 말대로 자신은 럭키한 편에 속한다.

눈에 띄는 남다른 외모에서 오는 이질감을 극복하는 일로 기가 죽어 잔뜩 주눅 들어 사는 입양인들.

폭력 가정을 만난다거나 심지어 파양을 당해 국적조차 없이 떠도는 입양인들도 있다고 한다.

전쟁 직후 외국 군인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출생한 혼혈아들을 ‘임시 구호’ 형태로 입양 보내면서 시작된 해외입양 역사다.

2023년 홀트인터내셔널 홈페이지에 공시된 한국 아이 입양 수수료는 4만 5천~6만 2천 달러라는 뉴스를 들었다.

실제로 2004년 뉴저지에서 한국 고아를 입양하고자 삼 년씩이나 기다리고 있다는 미국 변호사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머리가 샤프한 데다 귀엽고 온순하다 소문나며 한국인 입양은 차례를 기다리는 대기 줄이 아주 길다고 했다.

현재는 출생률이 고작 0.7명으로 쪼그라든 나라, 진작에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에서 벗어난 대한민국이긴 하다.

하지만 입양인들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 모양새, 아무것도 모른 채 물건처럼 팔려왔다며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현재 자신이 처한 위치나 입장에 상관없이 그들은 자신을 버린 모국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게 역력했다.

조카에게도, 그들과 최일선에서 만나는 너희들이 당시 사회상을 잘 이해시켜 화를 다스려 주는 완충지대 역에 충실해 주길 당부했다.

지금, 먼 나라로 흩뿌린 씨앗들이 움쑥 자라 자신의 정체성, 뿌리를 찾겠다며 대거 몰려오고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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