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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0. 2024

그녀와 함께 밀감 따던 날


꼭 일주일 전, 지난 토요일 열 시 가까이 된 밤이었다.

마침 잘 생긴 청둥호박이 있어 호박김치와 파김치까지 담느라고 오후 내내 바빴다.

양념에 쓱쓱 버무린 호박김치를 김치통에 잘 갈무려 둔 뒤에야 아차! 했다.

그제야 겨우 사진 생각이 났을 만큼 경황없이 분주하게 설쳤던 것.

왜냐하면 먼 데서 오는 특별한 손님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오기로 한 앤으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길래, 일요일 아침 삼춘네 귤밭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사정이 있어 못 오게 됐나 보다 했는데 열 시 넘어 뒤늦게 비행기에 올랐다는 소식이 왔다.

안 오는 줄 알고 내일 아침 일찍 귤 따러 가게 됐으니 도리없이 오후에나 만나자고 하였다.

그녀는 자기도 탠저린 따는 experience를 해보고 싶다며 같이 가면 안 되겠느냔다.

색다른 경험, 딴은 그것이 여행의 진미렷다.

 
뉴욕대를 나와 월가에서 경영 컨설턴트로 일했다는 그녀는 커리어 우먼인 뉴요커다.

맞네, 유럽 각처를 돌아다닌 그녀에게 정방폭포나 외돌개가 대수랴.

해서 다음날 아침 일곱 시 반 내 거처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옷 따뜻하게 입고 오라는 주문을 단디 해뒀다.

일요일 아침, 우리는 그렇게 첫 상면을 했다.

첫 상면이라니?

우리는 난생처음 만난 사이다.

다섯 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좋은 양부모를 만난 덕에 잘 성장한 그녀가 친생부모를 찾고자 한국에 왔던 거였다.

하지만 입양 서류가 엉성해 출생에 관한 아무런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게 됐다.

그간 작은 단서라도 찾고자 최면요법까지 동원해 봤다는데 하얀 할머니 모습과 장례식 장면만 떠올려 더 이상 연결점을 그을 수 없었다고.

현재 65세인 그녀는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나 심한 장애는 아니었다.

떠나기 전 짧게 제주를 여행하겠다며 온 그녀와는 배넷모임을 통해 인연이 이어졌다.

배넷모임을 이끄는 조카는 입양인마다 서귀포를 여행지로 삼으니 아무래도 서귀포 지부를 만들어야겠다며 웃었다.

 
하늘 유난히 푸르른 날, 우리는 감귤 창고에서 쪼그린 채 그녀로서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녹두죽으로 요기를 했다.

그녀는 김장김치 곁들여 맛있게 그릇을 비웠다.

믹스커피만은 맛이 이상하다며 사양을 했다.

친구네 와이너리에서 여러 번 포도를 따봤다더니 전지가위를 사용하는 요령이 나보다 월등 나았다.

우리는 감귤 따기에 세 시간을 할애하고 가까운 치유의 숲으로 갔다.

무장애 숲길을 거닐며 여러 얘기를 나눴다.

내가 그녀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포인트는 1960년대의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는 점.

험한 한국전쟁으로 완전 폐허가 된 터라 밥을 굶기 예사였고 거지가 흔했던 세월이었기에, 널 입양 보낼 수밖에 없었던 걸 거라고.

그렇지만 한국인으로서 네게 진심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여기서 잠깐!

쓰다 보니 영어에 능통한 나인 줄 오해할 거 같아 밝히는데 폰의 번역기 도움이 컸다.

더구나 그녀는 동부의 영국식 영어, 말하자면 정통 고급영어를 구사한다.

배넷 모임에서는 나름 동시통역이 자유롭던 조카다.

그러나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 온 조카조차 진짜 동부의 세련된 발음은 못 따라잡겠다고 하니 나야 일러 무삼하리오.

오죽하면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고 물었지만 스케줄을 도통 알아먹지 못하더라는.

스펠링을 들이밀자 그제야 아하! 크게 웃는 그녀.

뉴저지 이웃 동네인 펜실베니아를 내가 아무리 반복해 말해도 무슨 소린지 끝내 알아듣지 못해 고개 흔들던 동부 쪽이다.

화이트 하우스를 와이라우ㅆ라고 할 정도로 발음상의 악센트가 다른 영어 아닌가.

 

 점심으로 뭘 먹고 싶냐니까 주저 없이 '흑돼지 삼겹살'을 한국어로 발음도 정확하게 하는 걸 보니 미리 정보 검색 깨나했던 모양.

마침 치유의 숲에서 가까운 거리에 아는 식당이 있어서 우리는 불판 앞에 마주 앉았다.

지글거리며 삼겹살이 익자 능숙한 솜씨로 상추쌈에 고기와 익힌 마늘을 얹고 양념된장 넣어 푸짐하게 한입.

젓가락질을 잘하기에 물으니 한국인의 DNA가 있으니까, 하더니 그간 사업상 일본을 자주 다녔다고.

식사 후 커피 마시러 스타벅스 가겠냐니까 오후에 커피 마시면 잠을 못 잔다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는 피차 간밤에 늦게 취침한 데다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었기에 각자 돌아가 쉬기로 했다.

월요일엔 한라산을 다녀오겠다며 집 앞에서 나를 내려주고 그녀는 숙소로 돌아갔다.

날씨 청명한 오늘, 그녀와 밀감 따러 왔던 귤밭에 다시 와 하늘을 보니 그날처럼 참으로 맑고 푸르기도 하다.

한 가지 변한 건 그새 애기동백꽃 활짝 펴있었다.

귤 따기 아주 좋은 날이네! 누군가 옆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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