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켜와 부름켜

생과 소멸

by 무량화

이른 오후 시간이다.

올레시장 옆이지만 처음 걷는 낯선 상가 골목에서다.

온갖 간판들 구경하며 한갓지게 걸었다.

천하태평, 만사 걸림이 없으니 유유히 돌아다녔다.

<넉점 반>이란 윤석중선생님 동시에 나오는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아기가 아기가 가겟집에 가서/영감님 영감님/
엄마가 시방 몇 시냐구요. "넉 점 반이다."
"넉 점 반, 넉 점 반." 아기는 오다가 물 먹는 닭 한참 서서 구경하고,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 잠자리 따라 한참 돌아다니다 해 꼴딱 져서 돌아왔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

천진난만한 아기는 하는 양이 귀엽기나 하지.

입성이나 매무새는 멀쩡해도, 나이 든 노친네가 일없이 동네 배회하면 자칫 치매노인으로 오인될 수도 있으렷다.

다행히도 때마침 길가 점포 현관 조형물 한 쌍에 시선이 멎는다.

주둥이와 목이 긴 타조 모형 인테리어인데 매우 독특하다.

심드렁하던 눈빛이 단박 생기로워진다.

오호~ 발상 자체가 재치 있고도 신박한데!

재질은 버려진 워싱턴야자나무 떨켜다.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폰을 꺼내 사진에 담는다.

따뜻한 오후 빛이 나무 벽을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유리창에는 거리 풍경이 비쳐 또 하나의 정겨운 세상을 그려낸다.
편의점 간판과 식당 메뉴판, 극히 평범한 일상의 골목이지만 타조 마리가 동화를 이끌어낸다.

기다란 목과 부리, 몸통은 둥그스름 부풀어 입체적이다.

전부 야자수 떨켜라 천연 소재이나 동그란 눈망울만은 인조 제품이다.

아래 사진이다.



야자나무 떨켜는 크기도 하려니와 무게감도 여간 아니다.

게다가 양측으로 쎈 가시도 돋아있어 가을부터 겨울까지 바람 거센 날은 떨켜가 멋대로 떨어지므로 나무 주변에서는 주의해야 한다.

강풍 몰아치던 날, 중앙로터리에서 야자수 떨켜가 낙하하며 행인을 덮칠뻔한 광경을 목도한 후부터는 겁을 먹게 되었다.

워싱턴야자수는 곧게 쭉쭉 뻗은 위용도 대단하지만 밑둥을 보면 마치 코끼리 다리같이 육중하게 생겼다.

우둠지에서 시원스레 출렁거리는 잎새 규모는 어디까지나 소수정예군을 지향한다.

이파리가 많지는 아니하나 한 줄기 한 줄기가 탱크부대처럼 강력하다.

그 잎자루를 지탱했던 떨켜층이다.

떨켜(離層)는 낙엽이 질 무렵 식물의 잎자루와 가지가 연결된 부위에 형성되는 특수한 세포층으로, 잎새로 공급되던 수분과 양분을 차단시킨다.

동시에 잎이 떨어진 자리에 바이러스나 세균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보호막 기능도 한다.

기온이 떨어지면 나무는 전자동으로 겨울나기 준비에 들어간다.

성장 호르몬이 끊기며 활엽수는 물론 침엽수조차도 모든 나무는 연차적으로 잎이 떨어진다.

그게 자연의 순리이며 우주순환의 섭리다.

제 몫을 다 하고 미련 없이 떨어진 떨켜.
바람을 견뎌내고 햇빛을 모으던 잎이 제 역할을 끝내고 내려앉은 흔적을 주워다 누군가는 타조를 만들었다.
폐기된 존재, 생의 끝이 장식이 되는 일은 흔치가 않기에 타조로의 부활이 미쁘게 다가왔다.

하여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올려다보게 했다.
일흔 후반이니 나 또한 머잖아 떨켜로 떨어질 나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떨켜처럼, 제 할 일 완벽하게 다 마쳤노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좋으련.

됨됨이가 많이 모자란다는 건 자인한다.



지지난 해 바깥사돈의 부음을 듣고 부산에 갔었다.

죽는다는 것을 '돌아갔다'라고 표현하듯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여정이 누구에게나 녹록한 건 아니다.

한 생애 애면글면 부둥켜안으려 했던 모든 것 훌훌 떨치고 빈손 되어 떠나가는 본향.

난생처음 화장장에 가봤기에 처음으로 육신이 한 줌 재되어 마침표를 찍는 자리와 마주해 본 셈이다.

인생무상, 정녕 허망하기만 했다.

분명 있었는데 홀연 존재 자체가 영영 소멸되는 과정이 그리 간단하다는 게 실제감이 들지 않았다.

이게 뭐지? 이렇게 쉽게 사라지는 존재인데 살아생전 무엇에 그리 집착했더란 말인가.

사천 산골짜기 절은 거대 사업장처럼 위풍당당했으니 화수분이 된 납골당을 보면서 영 씁쓰름했다.

비좁은 국토라 납골당을 장려하나 그 또한 부질없기 이를 데 없다.

화장을 하면 무기물은 연기로 사라지지만 유기물인 뼈는 한 줌 가루로 남는다.

그마저 무화시켜 기체로 흔적 없이 우주공간을 떠나게 하는 방식은 왜 아직 안 나서는지.

자연상태로 돌려보내는 히말라야 산중 티베트의 조장이나 외딴 섬마을의 풍장은 여전할까 모르겠다.

삼대가 한데 모여 살던 대가족제는 진작에 사라지고 점점 핵가족화되더니 이젠 1인가정이 확산 추세다.

제도며 시스템 모두가 급변하는 시대다.

이런 판에 죽어 제삿밥 얻어먹을 생각은 헛꿈이다.

자식 대까지는 유효할지 모르나 후대 그 누가 애통해하며 날짜 챙겨 추모제든 연도제든 제를 올릴 것인가.

명절 즈음 해외로 여행 가는 인파를 보면서도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떨켜 반대편에는 부름켜가 있다.

부름켜(형성층)는 단어 뜻 그대로 식물이 불어나 굵어지도록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불러내면 곧장 응답할 것 같은 생명체가 준비된 자리다.
가지 끝에서 새순을 틔우려는 작은 맺힘도 부름켜의 활동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 부름이 약하디 약하고 미미하다.
아기 울음이 귀해진 세상이다.

한집 건너 하나는 비혼주의자라는 말이 나돈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 선택의 한 방식일 뿐이라고 관망을 한다.

결혼을 해도 당당히 아기를 갖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딩크족이 증가일로다.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탓할 수만도 없다.

사회구조 자체가 아기 낳아 키울만한 여건이 아니다.

불확실한 시대인 데다 세상살이가 팍팍해지며 이 고해에 자식 낳아 원망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인 세월이 돼버렸다.

50년대의 처절한 결핍을 참아 견디며 오늘날의 발전된 사회를 만들어 낸 한국인이다.

어떤 변화에도 적절히 대응하며 적응해 온 인간이다.

우리는 바람을 바꿀 수는 없지만, 돛을 조절할 수는 있다는 말대로다.

그러나 AI가 지배할 미래도 미심쩍고 두렵다.
바닥을 치는 출생률이라는 말이 겨울 마른 가지 끝에 아프게 스민다.
떨켜가 많아지는 숲과 부름켜가 줄어드는 나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정부는 연일 특단의 조치들을 발표하며 출산장려금 명목으로 세금을 쏟아붓고 있으나 반응은 시큰둥하다.

이 문제에 대해 진화생물학자인 최재천교수는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엄청난 예산 집행 대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다.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덴마크나 네덜란드처럼 적은 인구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구조를 전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인구절벽으로 압박하며 위기감을 조성하기보다는, 적정 인구 규모로 감소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삶의 질 개선에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래도 떨어짐과 돋아남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인류는 앞으로 계속 나아갈 것인가.
떨켜를 활용해 만든 독창적인 작품을 보면서 든 생각이 가지를 치며 설왕설래 길어졌다.

아니다, 죙일 폭풍의 언덕같이 비바람 치는 날씨 탓에 흐름이 철학 비스무리해졌다.

오후에 완성시킨 첫 글을 날리고 어거지로 다시 엮느라 저녁식사도 여태 미뤘다.

못 말리는 잡문 써제키기 중독 증세도 여간 한심스러운 게 아니긴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