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이야기

2004

by 무량화



시련과 고난의 시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던가. 크로커스 수선화 여린 순이 봉긋해지며 봄이 온듯싶더니 심술이라도 부리듯 난분분한 눈발이 대지를 하얗게 덮어 버렸다. 다시 빙점의 침묵이 이어졌다. 봄은 한바탕의 눈과 거친 바람에 자꾸 떼밀리고 있었다. 그러나 뒤란에 잔설 희끗해도 절기는 역시 어김이 없는 법. 입춘에 이어 우수 지나자 기지개를 켜며 서서히 동면에서 깨어나는 삼라만상. 단풍나무 잎눈 한결 도톰해졌다.



한국에서는 정월 대보름 무렵 범어사 대웅전 앞 매화가 봉오리를 터뜨림으로 봄의 기척을 맨 먼저 눈치챌 수 있었다. 반면 뉴저지에선 화창한 양광 아래 생기를 되찾는 상가의 꽃 가게에서 봄기운을 읽는다. 언 땅 비집고 연한 촉을 밀어 올리는 스노드롭, 봉오리 져 소복이 올라오는 히아신스, 착해 보이는 바이올렛 등 봄을 여는 꽃들이 말간 얼굴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겨우내 묵혀두었던 뜰을 새로이 단장시키려 꽃 가게 앞에 속속 차를 대는 표정들이 꽃만큼 환하다. 비료포대보다 더 큰 부엽토를 카트에 실은 다음 조막만 한 화분에 심어진 꽃모종을 사고 싱푸른 화목을 고르는 손길에서 행복이 피어나는 것 같다.



잘 가꿔진 화초를 완상 하는 즐거움도 크지만 그보다 나는 키우는 재미를 우선으로 치는 터. 첫 봄 새 친구로 작은 목베고니아 화분을 하나 골라 들고 왔다. 올망졸망 둘러앉은 우리 집 꽃나무들 사이에서 허우대가 훤칠하니 돋보이는 건 벤저민이다. 의젓한 현관지기 노릇을 하는 벤저민은 어느 해 봄 우리와 인연이 닿았다. 지금은 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크나 당시엔 허술하니 보잘것없는 관엽수였다. 다만 빈약한 대로 균형 잡힌 수형이 푸른 잎새의 건강미와 더불어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허둥거리게 하는 바쁜 일상에 매몰돼 시비(施肥)는커녕 그저 한 번씩 물이나 주는 게 고작이었다. 비가 오는 날 더러 선심 쓰듯 밖에 내놓고 흠뻑 비를 맞게 했을 따름인데 그 여름을 지나며 벤저민은 화분이 비좁아 터질 듯 움쑥 자랐다. 콩나물도 아닌데 물만 먹고도 왕성한 생명력을 보이는 벤저민이 대견스러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둔한 나는 그가 겪는 내부의 고통을 짐작조차 못했다. 부스스하게 윤기 잃어가며 애 마른 병색으로 잎 끝이 말리자 비로소 벤저민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으니. 분갈이가 시급했다. 청소년처럼 키가 죽죽 크며 가지 무성해질수록 짙푸른 잎 풍성한만치 뿌리는 좁디좁은 화분에 갇혀 숨이 막혔을 벤저민. 하긴 나 자신 또한 정신없이 일에 휘둘리며 살다 보니 열이 심하게 오르거나 참기 힘든 통증 등 건강에 빨간불이 켜질 때야 비로소 몸의 이상 유무를 살피게 된다. 그러니 벤저민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며 숨 가쁜 신호를 보낼 때까지도 속 모르고 물색없이 연신 감탄사만 발했던 것이다.



나무에 비해 화분이 턱없이 작음을 진작에 헤아리지 못한 불찰. 흙 속의 자양분도 거의 소진된 데다 협소한 자리 탓에 위아래로 틈만 있으면 실뿌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그 모습은 조그만 웅덩이에 갇혀 산소부족으로 할딱거리는 송사리 떼를 연상시켰다. 작은 화분 안에서 뿌리끼리 서로 뒤엉켜 지내자니 말 못 하는 식물이지만 숨 막힘으로 오죽 갑갑했을까. 겨우겨우 화분에서 뿌리를 들어내보니 아주 해깝했다. 흙도 거의 없이 하얀 실뿌리끼리 마치 실꾸리처럼 뒤얽힌 채였다. 뿌리를 대충 솎아내는 등 손질한 다음 큰 화분에 옮겨 심으며 거름흙 속에 미안한 마음도 섞어 담았다. 깜냥껏 옳게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도 주지 않고 제한된 공간에 꼼짝없이 가둬 둔 삶. 목숨줄만은 놓아버리지 않았지만 살아 있음이 정녕 살아있음이었을까. 주어진 환경에 지배받기는 사람이나 식물이나 어쩔 도리 없는 노릇인지?



그때 문득 M이란 친구가 생각났다. 한 생명을 땅에 내보내며 하늘은 공평하게 저마다 한 가지씩의 달란트를 주신다 하였다. 그녀가 타고난 재능은 문재(文才)였다. 시만이 아니라 디자인 감각도 뛰어나 잡지사 편집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이고 독선적인 남편은 아내의 사회생활을 배려하거나 성원하기는커녕 용납조차 하지 않았다. 시대 조류와 상관없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남편. 그는 아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성장하는 걸 달가워할 리 없었다. 여성의 자아성취니 자기계발은 언감생심, 무조건 직장마저 못 다니게 막았다. 그 고집은 병적으로 완강해서 장성한 자녀조차도 아버지를 종내 꺾지 못했다.



자기 일을 통해 삶의 지평을 확대해 나가며 물 만난 고기처럼 활기차게 역량을 발휘해 나가던 그녀. 하지만 가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희생제물이 돼야만 했다. 도저히 이해시키거나 설득될 남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이 쉬워 이혼이지 상처받을 자녀들 생각하면 차마 그도 못할 짓, 당시만 해도 일방적으로 참고 견디는 몫은 여성이 전적으로 안아야 했던 시대.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에 순명하며 감내해 나갔다. 그렇게 자기를 포기하고 억제시키며 살다 보니 마른 낙엽처럼 겉늙어 나이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였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여간해서 속을 내보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나는 안다. 치레용이고 포장용일 뿐인 미소 뒤에 감춰진 그녀의 참담한 내출혈을. 그럼에도 긍정적으로 밝게 살려 애쓰는 그녀의 안간힘이 보기에 퍽 안쓰러웠다.



그녀는 순전히 타의에 의해 더 넓고 높은 창공을 날 수 있는 가능성의 나래를 억지로 접어야 했다. 활동 범위를 다양이 넓힐 수 있는 그녀에게 가정이라는 테두리는 너무 비좁았다. 그 좁은 틀에 억지로 꾸깃꾸깃 접어 넣은 날개나, 빽빽이 뒤엉킨 벤저민 뿌리나 숨 막히게 하는 조건이기는 마찬가지일 터다. 그녀는 자주 창을 열고 아주 깊은 호흡을 내쉬곤 했다. 갑갑하게 조여 오는 족쇄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글로의 도피뿐. 글을 쓰며 그녀는 스스로를 정화시켰고 비상을 시도했으며 구원받을 수 있었다. 그녀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환기창은 문학으로, 그 통로마저 없었다면 진작에 그녀는 고스란히 질식해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몸은 가두어도 정신까지 가둘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너른 화분에 옮겨진 뒤 벤저민은 자기 세계를 맘껏 확충시키며 저리 당당히도 푸르른데 그녀에게도 그런 날이 기약되려나?. 애면글면해 본들 되돌릴 수 없는 생의 여정. 어언 깊어지는 초겨울 나이에 접어든 그녀다. 사회의 일원이 되어 역동적으로 기량을 펼쳐 나갈 수 있는 기회는 세월과 함께 속절없이 흘러가 버렸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 접목될 수 없는 벤저민 이야기. 그러나 제아무리 머뭇거려도 섭리대로 순환하는 자연계의 질서에 따라 겨울 지나 봄은 오게 마련이다. 시련과 고난의 시간 뒤에 준비되어 있는 빛나는 영광의 시간. 그러나 우리에게 Spring 뜻 그대로의 봄은 두 번 다시 허락되지 않는다.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