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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3. 2024

섹시 걸 바라보다 무한 상상의 나래를

마침 뜰에다 이것저것 꽃모종을 하고 났는데 간밤에 단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잠결에 빗소리를 듣자니 뜨락에 새로 심은 꽃나무들이 어둠 속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을 것 같았다.

성심껏 옮겨 심은 꽃 가운데서도 제일 맘에 드는 꽃은 단연 매발톱꽃이다.

어쩐지 한국의 호젓한 深谷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살풋 고개 숙인 채로 진한 흙 내음을 맡으며 안도의 숨결 가다듬었을 매발톱꽃.

헌데 희한하게도 여기선 그 꽃 이름이 의외로 섹시 걸이다.

그리 보아서인지 앙큼스런 매력이 숨어있는 꽃으로도 비친다.


이른 아침 뜰에 나가니 비는 이미 멎었는데 온데 안개가 희뿜하다 못해 푸르스름하게 밀려다닌다.

짙은 안개 사이로 라벤더 꽃무리 연연한 보랏빛이 꽤 몽환적으로 보인다.

교태로이 한들거리는 자색 매발톱꽃도 아침 안갯속에서는 귀태 어린 품격마저 스며난다.


그 건너 잔디는 푸른 물 머금어 한층 싱그럽고 눅눅한 대기로 신록은 더욱 푸르고 그윽하다.


연연한 신록에 취해있다 보니 사념은 두서없이 이어진다.

산책 중에 아, 원추리꽃! 하며 반가움에 탄성을 보냈던 건 십여 년 전 일이다.


근데 너 왜 여기서 사니?


호랑나비처럼 화려한 참나리꽃도 마찬가지다.


오직 한국에서만 자라는 순 토종인 줄 알았는데 지조 없이 미국 땅에서 이리도 무성하게 흐드러지다니.


세계화시대에 살면서도 왠지 변절자 같아 앙큼스럽고 괘씸하고 그랬더랬는데...


어린순 데쳐서 나물로 무쳐먹기도 한 원추리다.


개망초 무리 진 초여름 언덕에 주황빛 조촐하던 그 꽃.


노고단에도 백령도에도 오색폭포 주변에서도, 한국 산야 어디서나 만나던 너 원추리꽃.

요즘 어딜 가나 흔하게 눈에 띄는 게 원추리꽃을 닮은 데이 릴리다.


한창 제철을 맞아 풍성히도 피어 있다.


도로변, 공원, 상가 정원 한 모퉁이에도 빠지지 않는다.


팬지, 피튜니아, 데이지처럼 미국가정 꽃밭에 당연히 끼는 꽃이 되어버린 원추리꽃.


 생장력과 번식력 좋고 성정이 까탈스럽지 않은 식물이라서인지 원예사들의 괴임 받으며 해마다 방석자리만큼씩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선진 세상에 실려와서 인위적 방법으로 품종 개량된 지금은 이름마저 무슨 릴리가 됐지만, 그렇다고 널 못 알아볼 리 있으랴.


 개량종이라 우리의 산야에서 보던 소박한 모습 하고는 다르긴 하나 아무튼 원추리다.

실제로 농업 관련 유전자원인 종자의 중요성을 인식한 유럽 각국은 일찌감치부터 식물학자들을 동원, 세계 각처에서 다양한 자원을 모아들였다.


그로부터 숱한 세월이 흐른 몇 년 전엔 미국이 수집해 갔던 우리의 토종 씨앗 일부를 고향 땅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는 신문 기사를 봤다.


 특히 한국 내에서는 멸종돼 찾아볼 수 없는 농작물 씨앗 다수가 그렇게 반환되었다. 그간 국토개발 과정에서 자생지가 파괴되면서 멸종된 식물도 있고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 개량 품종만 골라 재배하다가 사라져 버린 토종 종자들이란다.


우리가 지키지 못한 걸 남의 나라가 지켜준 이 아이러니는 또 뭔가. 하여간 나라 힘이 약하면 신라 범종, 고려청자도 빼앗기고 토종 씨앗도 빼앗기고 고유문자와 얼마저도 빼앗겨버리고 만다. 종당엔 주권까지도 깡그리 잃을 수 있다.


 시끄러운 세간사 잊으라는 뜻인가.
단풍나무 높다란 가지에서 청량하게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 범어사 숲에서 들었던 그 소리다.


태평양 건너 대서양 기슭 뉴저지에서 듣는 꾀꼬리 노래야말로 반가움에 와락 허그라도 하고 싶다.


그럼에도 이승이 아닌 딴 세상 소리만 같아 느낌 묘하다.


새삼 모든 주변 풍경들이 꿈결인 양 아슴히 여겨지는가 하면 최면상태에 든 느낌도 든다.


비현실적인 그러나 분명하게 다가오는 극히 사실적이며 친근한 정경들이 문득 미쁘고도 고맙다.


 


잔잔한 아침 평화를 휘저으며 뜬금없이 들려오는 '글루미 선데이'의 재즈풍 감미로운 멜로디.


일기예보를 듣기 위해 켜놓은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음악이다.


메모리얼 데이 황금연휴를 겨냥, 부다페스트로 초대한다는 여행 광고의 배경 음악이 은근스럽다.


아름답고도 비밀스러운 빌리 할러데이의 독특한 음색이 안개에 나른하게 젖는다.


몇 번인가 되풀이해서 본 영화 글루미 선데이라 아직도 영상의 잔영들이 또렷하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한 여인, 단숨에 보는 이의 넋을 앗아가게 하는 고혹적인 눈동자를 지닌 일로나 그녀.


카메라의 시인이라 불리는 촬영 감독 클로진스키가 그녀의 우수 어린 눈빛을 아름다이 부각시킨 영화였다.


“그녀의 노래를 듣는 순간 선택해야 한다. 삶의 전부를 건 사랑이냐, 아니면 죽음이냐!” 란 대사가 나직이 안갯속을 부유한다.


고풍스러운 부다페스트에서 한 여자를 사이에 둔 채 세 남자가 공유하는 묘한 사랑 그리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게 하는 멜랑꼴리한 그 노래.



동시에 또 다른 여인, 팜므파탈의 대명사 같은 루 살로메가 그녀 얼굴에 겹쳐 떠오른다.


영화 속의 가상 인물이 아닌 실제 독일의 여류 작가이며 평론가이자 정신분석가로 그녀 자신 명철한 지성인이었던 루 살로메.


그녀야말로 누구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당대 최고봉을 이룬 각계 명사들과 깊게 교감을 나누며 인습을 무시한 채

그들과 두루 연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특별한 여인이다.


그중엔 니체, 라이너 마리아 릴케, 프로이트, 파스테르나크, 융, 바그너 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포함된다.


이렇듯 한 시대 유명인들에게 그녀는 정신적 도약대 혹은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한편


그들 인생을 혼란스럽고 허무하게 만들기도 하였거니와 자살로 이끌기도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성적 사랑을, 한번 채워지고 나면 욕망이 사라지는 육체적 열정 정도로 이해했을 뿐이다.


절대 성실성에 기초한 지적 사랑만이 시간을 견디어 내며 오래 유지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도


유희처럼 사랑을 나눈 그녀.



상류 사교계에서 소문나길 그녀와 교류를 갖는 남자는 아홉 달 안에 불후의 명저를 낳게 된다는


유행어까지 돌았던 영혼의 메신저 루 살로메.


릴케와의 만남에서는 뜨겁게 사랑을 불태우지 못한 대신 그를 불멸의 서정 시인으로 만들었던 그녀다.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절절한 헌정시를 바친 집착증에 가까운 릴케의 사랑을 입은 그녀가 아닌가.


자신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지성이라 여겨 두 차례나 청혼했으나 거절당한 니체.


그와는 사랑 아닌 사랑을 하여 그를 더욱더 지독한 허무주의자로 만들었고 종내는 정신착란에 빠지게 한 그녀이기도 하다.


그녀를 정성스레 사랑한 프로이트와는 지적 협력자로 남아 그로 하여금 현대 최고의 정신분석가가 될 수 있게 도운 루 살로메.


뇌쇄적인 몸매나 출중한 미모가 아닌, 그와는 격이 다른 지적 매력을 지녔다던 그녀다.



하긴, 우리의 야생화로 알고 있는 청초한 매발톱꽃이 미국에선 요염한 섹시 걸이란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문화와 관습, 정서가 서로 다를 뿐 아니라 매사 주관적 관점에 따라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외려 솔직하지 못하여 음전한 체하며 내심 야릇하고 발칙한 이미지나 떠올리는 게 더 내숭스럽지 않은가.


일로나, 루 살로메 그녀들이 비록 일반적 도덕 기준을 거부했다손 쳐도 그래서 헤픈 여자로 지탄받는 게 마땅하다고 매도해 버리는 우리의 의식은 옳은 건지.


저변에는 알게 모르게 남성우월주의의 틀에 묶여 살아온 내력도 숨길 수 없을 터.


그녀들의 자취가 왠지 닿을 수 없는 피안의 강 건너 풍경처럼 아름답게 그려짐은 나만의 불순한 발상일까.


점차 하늘이 푸른 기운으로 틔여온다.


"밀려오는 꿈의 물결이 나를/그대의 거대한 고독에/상륙시키는 것만 같습니다."


살로메 그녀가 노래했던 <볼가강> 물빛처럼 깊고 푸르게 하늘이 열리고 있다.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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