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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 유람선

by 무량화


이 유람선은 화순항에서 출항한다.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을 마주 보며 달려, 금모래 해변 -> 소금막 -> 단산 -> 형제섬 -> 사계해안 -> 송악산 진지동굴 -> 절울이 동굴 -> 주상절리 -> 멧돼지 바위 -> 가파도, 마라도 -> 형제섬 근접해 두꺼비바위 -> 촛대바위 -> 한라산, 군산 -> 용머리해안 -> 화순항 도착까지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이태 전 서귀포항에서다.

문섬과 범섬을 도는 유람선을 탄 적이 있다.

하늘 청명해 유람선을 타기에 최적의 날씨였다.

한라산 웅자가 또렷하게 드러났으며 범섬 동굴벽도 놀라웠지만 주상절리야말로 명품 중 명품이었다.

이후 제주를 찾는 여행객에게 기상상태 좋은 날은 서귀포항에서 유람선을 타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단 한 차례 승선했지만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두 섬 다, 점성이 큰 조면암질 용암으로 이루어져 용암돔(lava dome)이라고 불리는 화산체다.

제주도의 기반 암석인 현무암이 아닌 조면암 절벽과 해식동굴, 주상절리 등 수려한 경관 빼어났으며 학술적 가치가 큰 특산 동식물의 서식지이다.

둘 다 섬 모양이 독특해 본섬 옆에 꼬리처럼 생긴 새끼섬을 거느렸다.

마치 그 모습이 귀여운 돌고래처럼 보인다.


친구 유선생이 스쿠버 다이빙하며 찍은 문섬 심해. 당시 그녀는 78세

섬을 도는 유람선 관광이 하도 좋았기에 이어서 잠수함을 타봤는데 저으기 실망하였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자 천연기념물 421호로 지정된 天然保護區域이기도 하거니와 스쿠버들이 즐겨 찾는 바다인 문섬 주변이다.

플랑크톤이 풍부하며 감태같은 해초 무성해 물고기가 떼로 모여든다는 이곳.

수중 비경을 품은 보물섬이라서 원주민이나 해녀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일제 강점기 시, 여간 꾀를 부린 게 아니었다.

얍삽한 왜인답게 모기가 지독스레 많다고 선전하며 모기를 뜻하는 한자를 빌려 모기 문(蚊), 문도(蚊島)라 못 박았다.

새연교 오가며 본, 광고판의 아름다운 물꽃 산호초와 떼 지어 살랑거리는 열대어와 전복 소라를 구경하리라 기대했으나 이 바닷속 역시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피해를 비껴가지 못했으니.

수중발레하는 물고기 군무는커녕 눈을 홀리는 쇼에 다름 아닌 자그마한 줄돔만 몇 마리 스쳐갈 뿐, 곳곳에 백화현상이 진행 중이었다.

생각만큼 수질도 맑지가 않아 시야 희뿌연 터라 유람선에 비해 여러모로 실망스럽기만 했다.



화순항에서 산방산 유람선을 타기로 한 아침.

비가 내릴 듯 회색 구름장 무겁게 드리운 데다 바람조차 거셌다.

점차 하늘은 틔어왔으나 배를 타기엔 영 별로인 날씨였다.

우산과 비옷을 지참하고 왔지만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금모래해안을 제쳐두고 동쪽으로 내처 걷자 유람선 선착장이 덩그러니 서있었다.

승선 신고서를 작성한 다음 티켓팅을 하고 해안으로 나갔다.

화순항 물빛은 우중충했다.

그럼에도 바다는 의외로 고요했다.

잿빛 바다 표정은 사뭇 무뚝뚝하나 파도 잔잔해 뱃멀미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됐다.

배에 오르자마자 2층 선실로 쫓기듯 들어갈 만큼 바깥 기온은 무척 차가웠다.

옷섶 단디 여민 다음 스카프를 히잡처럼 덮어쓰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파도가 튀며 염분으로 얼룩진 창, 군오징어 내음과 뭇 소음이 뒤섞여 선내 분위기 왁자했다.

밖에 나가 사진을 찍으려도 너무 춥고 을씨년스러워 도시 내키지 않았다.

사진 담아내기엔 이 날은 기상도, 여건도, 형편 또한 받쳐주질 않아 저만치 창밖 산방산만 내다봤다.

출항하자 선수(船首)에서 갈라지는 파도 하얗게 일어섰고 이물에서 고물까지 너울거리는 갈매기 나래짓만 분다웠다.



조붓한 금모래해변을 스치고 화순곶자왈 아래 소금막을 지나 산방산 기슭 용머리해안가로 유람선은 바짝 다가갔다.

바다로 쑥 들이민 용머리를 수차 훑은 터라 특별히 새로울 건 없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체로,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이자 천연기념물 제526호이며 지질트레일 코스 중 압권인 곳이다.

자연이 빚어낸 웅장한 사암 절벽과 평행 지층, 해식 동굴과 벽면에 벌집처럼 난 구멍(풍화혈: 타포니)을 바로 곁에서 관찰할 수 있는 특이지대다.

수중 화산 폭발로 생성된 응회암층이 파도에 깎여 형성된 층리 절경이 그랜드캐년 협곡을 떠올리게 한다지만 반 시간 정도면 전체를 돌 수 있는 소규모다.

용머리 해안을 빙 둘러 사계해안 뒤로 솟은 바굼지오름 기이한 산세 일별하고, 돌아오며 자세히 볼 형제섬은 먼 빛으로 눈도장만 찍어뒀다.



송악산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기도 자주 찾아와 걸었던 곳으로 언제이고 바다에서 조망해보고 싶은, 측면이 무척 궁금한 송악산이다.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가제 특공대를 둘 정도로 전쟁에 미친 일제가 송악산 자락 암벽을 뚫어 진지동굴 수 곳을 구축해 놓았다.

송악산 가는 길목인 산이수동에서도 육안으로 관찰되는 암벽 동굴이 서너 개.

이웃한 알뜨르비행장과 연계, 송악산 주변부에도 동굴과 땅굴 여기저기 파놓았다.

처음엔 중국 본토를 겨냥한 교두보로, 도중엔 제이차대전 연합군을 격퇴시킬 목적으로.

그러나 유람선을 탔으니 유람 뜻 그대로, 경치 좋은 곳을 돌아다니며 구경이나 하면 된다.

송악산 해벽을 병풍 치듯 둘러싼 주상절리대는 뜻밖인만치 더 신기하고 놀라웠다.

규모면에서 대단한 수직 돌기둥의 퍼레이드는 신전을 장식하듯 정성스럽고도 장엄하게 펼쳐졌다.

이곳 절벽에 가로선으로 그어진 수평 주상절리대는 더욱 특별스러웠다.

수월봉 아래 절벽도 층리가 또렷이 발달된 퇴적층을 가로로 보여주는 화산 박물관이지만 가로와 세로로 드러난 송악산은 진기하기만.

물론. 대포주상절리대 외에도 갯깍주상절리대의 육각 돌기둥 위용은 범상치가 않다.

범섬 남측 절벽과 천제연 제1폭포며 안덕계곡 등에서 가까이 접해본 주상절리에 비하면 송악산의 경우 일단 차지한 면적 대단하다.

미 캘리포니아 매머드레익 인근의 Devils Postpile National Monument 육각형 현무암 기둥이 솟은 주상절리대에 비견된다 할까.

무등산이 품은 주상절리는 구경을 아직 못했고 포천 한탄강 일부 구역에서 본 주상절리대는 놀라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배는 천천히 해안선을 따라 돌면서 절울이동굴이며 주상절리대와 멧돼지 바위 등을 변사(辯士) 못잖게 걸쭉한 입담으로 설명해 주는 스피커 소리.

원주민들에게 '절울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이곳. '절'은 파도를 뜻하고 '울이'는 울음을 뜻하므로 곧 '파도가 우는 산'이란다.

깎아지른 해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마치 산이 울부짖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다에서 올려다보니 더 실감이 난다.

그 순간 마라도와 가파도가 멀리서 가물대며 제 존재를

알린다.

화창한 날엔 송악산에서 조약돌 던져 폴짝폴짝 물수제비 뜨듯 아주 가차이 놓인 섬들이다.



그쯤에서 뱃머리를 돌려 유람선은 형제섬 향해 유유히 전진한다.

뱃전으로 잠시 나서보나 여전히 찌뿌둥둥한 기상도에 해풍 차갑다.

그래도 형제섬만은 창문을 통해서가 아닌, 직접 맨눈으로 대면하고자 선실을 나선다.

파도가 없어도 좌우로 기우뚱 거리는 몸을 겨우겨우 추스르면서.

삼각대처럼 두 발을 이물 밧줄 양편에 기댄 채 중심을 잡고 선다.

문득 시동이 멎자 시선 멈춘 곳에 형제섬은 있었다.
본섬 가까이 다가가자 바위의 결이 눈에 들어왔다.
거칠 것이라 생각했던 표면은 뜻밖에도 매끄러웠다.
마치 대패로 밀어낸 듯 군더더기 없이 반듯한 면이었고 색은 검었다.
빛을 반사하기보다 안으로 삼켜버리는 단호한 검은색.

형제섬은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형제만 서있는 줄 알았는데 복판에 자그마한 막둥이 두꺼비섬도 있었다.

암초들까지 드러나면 숫자는 더 늘어나겠고. 촛대바위만 해도 낚시삼매경에 빠진 강태공이 아슬아슬 서있다.

낚시꾼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자리는 안전과는 거리가 먼, 파도와 바위 사이 사람 하나 겨우 설 수 있는 자리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낚시질에 빠져 있었다.

아주 잠깐 그때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낚시를 즐긴다면 나도 저 위에 설 수도 있겠구나.

서지 않아도 되지만 미친 척 설 수도 있는 자리.
가지 않아도 되지만 주저 없이 갈 수도 있는 방향.
그 가능성이, 그 선택여부가 문득 현기증 나게 만든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문장이 그제야 몸으로 와닿는다.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주는 가벼운 흔들림.
불안은 나에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흔들림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이 흔들림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 부풀어 가는 것.

뱃멀미도 아닌데 어지럽다.

조금씩 멀어지는 형제섬.

검은 바위와 주변 갯바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검은 실루엣이 외계 풍경만 같다.

게다가 섬의 머리 부분은 검붉은 송이가 더께진 채 두터이 얹혀 있어 낯설다.

생소한 그림이라 어쩐지 이물감이 들며 겉도는 느낌.
모든 풍경마다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떤 날은 감동 대신 하나의 생각을 남긴다.
그 생각은 깊고 그래서 오래간다.
이날의 바다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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