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생태숲 노루귀꽃
얼마 전 얼음새꽃 만나고 온 한라생태숲을 다시 갔다.
노루귀꽃 피었을까 궁금해서다.
하마나 싶어 내달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낙엽 새새에 흰 점 점점이 쌀튀밥 흩쳐놓은 듯 핀 꽃.
혼효림 지나 숫모루 가는 삼거리 길에서 양치식물원 쪽으로 걷다 보면 연리목이 기다린다.
100년생 고로쇠나무와 때죽나무가 서로 한 몸이 된 사랑나무 언저리에 해마다 세복수초 소담스레 피고 노루귀도 가느다란 줄기에 하얀 꽃 물고 서있다.
연리목 인근이 바로 그들 야생화가 자리 잡은 터다.
한창인 얼음새꽃 무더기 사이로 독초인 천남성 촉이 그새 탐스러이 돋아났다.
독성 강한 식물이지만 새 순은 보기에 먹음직스러운 산나물처럼 연하고 윤기롭기까지 하다.
숲은 아직 봄맞이 준비가 덜 된 상태라 낙엽수는 여전히 나목인 채 떨고들 있다.
가랑잎 바스락대는 숲으로 들어가자 자그마한 하얀 꽃이 눈에 들어온다.
하도 작아 무릎걸음하며 쪼그려야 겨우 보이는 꽃대. 성큼 지나치면 십중팔구는 놓치고 만다.
그만큼 존재감 미미하다.
눗누런 낙엽과 솔잎 사이, 아직 대지의 기운 차가워 부엽토에 의지한 노루귀꽃 송이 송이가 줄기 곧게 세우고 꽃피어 있다.
가녀린 줄기는 잔바람에도 흔들려 분질러질 듯 위태로운데, 그 연약함을 감싸듯 온몸에 촘촘한 솜털 보얗다.
햇살이 비치자 솜털은 은빛으로 떠올라 보호층처럼, 스스로를 데우는 외투같이 따습게 보인다.
차가운 계절을 뚫고 올라온 생명의 방식이 이토록 섬세하고도 치밀하다니.
부드러운 솜털 한 올 한 올이 모여 바람을 막고, 체온을 붙들고, 봄을 기다렸나 보다.
봄은 늘 이렇게 시작된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그토록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봄은 열리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 나는 신춘의 전령들을 만나러 한라생태숲에 온다.
약속 굳게 한 적은 없지만, 어김없이 오고. 오면 이곳에서 그들과 다시 조우한다.
풍성한 세복수초, 여리여리한 노루귀.
노루귀 꽃은 세복수초 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세복수초가 봄을 만방에 선언하는 꽃이라면 노루귀는 나지막이 봄을 속삭이는 꽃이다.
이 숲의 노루귀 꽃은 유난히도 흰빛이다.
색을 드러내기보다 빛을 머금거나 깃드는 쪽을 택한 듯, 고즈넉 수수하다.
노루귀 꽃은 서둘러 급하게 피지 않는다.
겨울의 긴 시간을 견딘 뒤 이른 봄 짧은 햇살 받아 안고는 가만히 꽃잎 연다.
숲은 경쟁의 장소라기보다 순서를 지키는 장소다.
먼저 피는 꽃이 있고 조금 늦게 피는 꽃이 있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여태껏 눈여겨본 바 없는 노루귀 잎을 첨으로 보았다.
갓 올라온 둥근 잎새는 세 쪽으로 갈라진 심장형이다.
다육이처럼 잎이 두텁고, 표면은 검녹색에 얼룩무늬가 났으며 뒷면에는 솜털 빼곡하게 덮여 있어, 꼭 어린 노루의 귀처럼 오목하면서도 부드럽다.
노루귀라는 이름이 잎 모양에서 왔다는 게 맞겠다.
다친 노루가 이 꽃을 먹고 상처가 나았다는 옛 전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꽃을 치유의 상징으로 여기는가.
어쩌면 상처를 고쳐준 것은 꽃이 아니라 소생의 봄 덕이었을지도.
실제로 봄이라는 계절 자체가 용솟음치는 기운인가 하면 삭풍 속에서의 오랜 기다림을 전제로 하는 것.
그래서일까.
노루귀의 꽃말은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인내심과 상대방을 향한 깊은 믿음 그리고 희망이다.
낙엽 사이에서 고개 갸웃 들고 있으나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는 꽃은 저마다 일고여덟 장의 꽃잎을 둘렀다.
그럼에도 너무 미소한 존재다.
꽃 한 송이가 쌀튀밥보다도 작고 키도 나지막하니까.
크기가 의미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연은 자주 이렇게 증명한다.
보이는 것은 작지만 여기까지 오기 위해 지나온 시간은
결코 적거나 가볍지 않다.
노루귀는 겨울을 견디고 난 자리에서만 핀다.
그래서인지 그 흰빛은 밝다기보다 애연하도록 희다.
이 작은 것을 보기 위해 매 해 이 숲을 찾는 나.
겨울 동안 땅에 누워있던 가랑잎들은 이미 한 겹의 세월 흐르면서 부드러운 살결은 삭고 잎맥만 남았다.
형태만 남은 것들 위로 새로운 생이 올라온다.
그 모습은 묘하게 다른 듯 닮아 있다.
사라짐과 드러남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겹쳐진 장면이 종소리 같은 여운을 남긴다.
선망의 대상 되어 크게 이름 떨치며 살아가는 이도 있지만, 보다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살아가는 이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