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살이 삼매경

달팽이 더불어

by 무량화

십 년 전 이 무렵 캘리포니아 랭커스터에서의 어느 하루다. 낮기온은 70도를 상회하나 밤은 30도 선으로 급강하한다. 사막 기후대의 특징이다. 한낮엔 반소매를 입지만 해가 설핏해지면 히터를 가동해야 한다. 그만큼 일교차가 크게 난다. 감기 걸리기 십상인 날씨다.


'사막은 대리석처럼 매끄럽다. 낮 동안에는 그늘 하나 만들어 주지 않고, 밤이 되면 바람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킨다. 수증기가 없는 대기 아래에서 땅은 열을 빨리 발산한다. 벌써부터 아주 춥다. 일어나 걷는다. 하지만 금세 견딜 수 없이 몸이 덜덜 떨린다. 손이 하도 떨려서 더는 회중전등을 사용할 수가 없다. 이렇게 얼어 죽어야 한다니 마음이 아프다. '



비행 중 리비아 사막에 추락한 뒤 빈사상태에서 기적적으로 구조된 조종사 얘기인 생덱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 >에 나오는 한 문장이다. 전에는 이 책을 읽어도 대충 짐작뿐 전혀 실감을 못하던 밤의 사막 추위를 제대로 체감하며 지낸다. 그래도 품섶으로 파고드는 뉴저지 초봄 추위에 비하면 이쯤은 감지덕지다. 밸런타인데이 대목을 앞둔 꽃집 친구가 그곳은 너무너무 춥다며 카톡을 보냈다. 어느핸가는 밸런타인 즈음해 심한 폭설로 가게문조차 열지 못한 적도 있었는데 어쩌나...


사방을 둘러봐도 황량히 펼쳐진 평지뿐인데도 고도 2.700 피트에 이른다는 하이데져트 지대다. 멀리 둘러선 시에라 네바다 장중한 산세의 평균고도는 8~9천 피트에 육박한다. 일교차가 큰 대관령에서 키운 고랭지 채소가 한국에서는 인기라는데 우리집 텃밭의 채소들은 자동으로 고랭지 채소에 속한다. 아침에 둘러보면 잎새 가장자리를 따라 성애가 하얗게 끼어있다. 밤새 기온이 영하 가깝게 내려갔으니 수분 많은 푸성귀라 냉해를 입을 만도 하다. 그래도 용케 얼어 죽지는 않았다. 파그르르 데친 듯 쳐져있다가도 낮이 되면 깨어나는 걸 보면 연하디 연한 것 같아도 저마다 모진 생명력들이다.



한낮에 길을 걷다가 달팽이를 보았다. 인도 한복판에 직경이 1.5인치 정도나 되는 제법 큰 달팽이가 꼼짝하지 않고 죽은 듯이 가만있다. 슬쩍 건드려보니 흡착판이 시멘트 바닥에 딱 붙어 있었다. 달팽이는 습기 찬 곳을 좋아하며 야간이나 비 오는 날 주로 활동하는데 어쩌자고 대낮에 이 메마른 거리를 배회하는가. 느리디 느린 움직임으로 무얼 찾으려 도로까지 나와 방향을 잃고 저리 난감한 처지가 됐을꼬.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철이기도 한 데다 데저트 지역에 흔치 않은 달팽이라 한편 신기했다. 그러나 달팽이가 눈에 띈 곳이 풀숲도 아닌 도로상이다. 만약 그대로 두면 밟히거나 아니면 땡볕을 견뎌내지 못할 텐데 위험한 상황을 본 이상은 그냥 모른 척 방치할 수가 없었다. 넙죽한 돌멩이를 주워 그 위에 달팽이를 옮겨서 조심스레 집으로 데리고 왔다. 인근엔 잔디밭은커녕 잡초도 없는 말끔한 포장도로이니 집 뜰에 풀어줄 작정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달팽이는 먹이로 상추를 가장 좋아하고 딸기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식성에 맞는 채소들이 널린 텃밭이 있으므로 안성맞춤, 일단 동정을 살피려고 연하게 촉이 올라온 앞뜰의 수선 포기에 놓아두었다. 몇 시간 후 어쩌고 있나 궁금해 뜰에 나가보니 달팽이는 수선 줄기에 찰싹 붙어 뿔을 내밀고 있었다. 이튿날은 밤새 수선 잎으로 자리를 이동했기에 오전 상추밭에 풀어준 것은 일종의 방생 의식이었다. 우선 생존에 알맞은 환경은 찾았지만 앞으로 달팽이가 잘 적응해 나갈지는 미지수. 달팽이 얘길 했더니 이웃들은 상추 다 갉아먹고 남는 게 없겠다느니, 호텔에서 먹은 에스카고 생각이 난다느니.... 번식력 강한 녀석들이라 자칫 뒤란이 달팽이 밭 된다며 어서 치우라고 야단. 그러나 무성생식을 하는 단세포생물도 아닌데 설마 혼자서 달팽이 천국이야 만들라고?


상추 그늘에 깃든 달팽이


일단은 산목숨 살도록 돕는 것이 우선이라 다른 문제는 잠시 보류해 두기로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팽이는 상추잎에 착 달라붙은 채 잎그늘 지붕 삼아 목하 식사 중. 추운 밤엔 오히려 지열에 의지하려는 듯 땅에 엎드려 잠들더니 낮만 되면 슬슬 잎으로 기어오른다. 뭇 생명체들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생존의 방식이야 본능에 의해 저절로 터득되나 보다. 이러다간 아이들처럼 달팽이 관찰일기라도 쓸 기세이지만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한 주간을 바쁘게 지내는 1인이다. 겨우 토요일이라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쉬다가 뒤란 텃밭으로 나갔다. 달팽이는 그새 다른 상추포기로 자리를 옮겼고 몸피가 좀 커진 듯 보였다. 채소가 푸르러지는 것만큼 풀들도 극성스럽게 자라고 있었다. 이부자리만 한 밭이지만 그것도 농사라고 오후 내내 잡초를 뽑느라 호미질을 했다. 햇살이 따사로워 제법 땀까지 흘렸다.



일을 마친 다음 흠뻑 물을 주고는 갈증 달래는 맥주에 고기 몇 점을 구워 솎은 야채에 싸서 먹었다. 손수 씨 뿌린 뒤 떡잎 마중한 다음부터 물 주고 눈길 주어 가꾼 청정 소채인 배추, 갓, 상추, 시금치가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해와 달과 별과 구름 그리고 바람, 천지의 정기가 목줄기를 타고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이다. 텃밭은 날로 푸르름 더해가고 몇 포기 솎아다 쌈 싸 먹고 겉절이 무치고 한 양푼 밥 비벼 먹으며 신선놀음 하느라 도낏자루 썩어나가도 모르겠다. 이만하면 전원살이 자족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일한 뒤라 잠은 꿀처럼 달 것이고.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