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소동

by 무량화

신새벽인데 앞마당에서 자지러질 듯 다급한 새소리가 들렸다. 청량하고 경쾌한 아침인사가 아니라, 여늬때와 달리 날카로운 비명에 가까운 지저귐이 심상치 않아 잠옷바람인 채로 쫓아나갔다. 한 마리도 아닌 새 서너 마리가 분다이 잔디밭을 맴돌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간 뜰에서 자주 보이던, 꽁지깃이 길고 등이 청남빛 나는 작은 새는 나를 보자 마치 하소라도 하듯 더 나대며 정신없이 우짖었다.



싸리빗자루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 매초롬한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새집 두 개가 나동그라져 있었고 푸르스름한 새알도 보였다. 거기에다 새집을 지은 줄도 몰랐는데 조밀한 나뭇가지 사이에 은밀하게 숨겨진 둥지가 두 개씩이나 깃들었던 모양이다. 절친끼리인지 바로 이웃해 가정을 꾸미고 똑같이 알을 낳아 훈기로 품고 있던 새들. 꼭두새벽부터 먹이를 찾으러 나갔던 아빠새도 돌아와 눈앞에 벌어진 참상에 혼비백산, 마냥 울부짖는다.



새벽 어스름에 무언가가 새알을 훔치려 침입하자 필사적으로 알을 지키려 한바탕 전쟁도 불사했던 어미새. 아마도 어둠 타고 나다니는 배곯은 길고양이의 소행이었지 싶다. 그 바람에 결국 새집은 땅바닥에 떨어지고 소중한 알은 깨어져버렸다. 마른풀을 물어날라 둥지를 짓고 가장 보드라운 제 가슴털을 뽑아 만든 보금자리에서 알을 품다가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변고를 만난 어미새. 졸지에 집도, 알도 다 잃는 재앙을 당했으니 새가 이성을 잃고 미친 듯 소란을 필 만도 하였다.



새끼 잃은 슬픔으로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지고 말았더라는 진나라 원숭이처럼 애끓는 심사로 우짖는 새.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가르쳐줘서도 아니다. 생명 가진 모든 것은 태생적으로 생존 본능과 종족유지 본능을 지니고 있다. 본능적 행동은 어떤 종(種)이거나 다 같이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자연적 적응방식이자 생활수단이기도 하다. 단 한번 태어나 일정 기간 살다가 떠나야 하는 일회성과 유한성을 무한대로 연장시켜 주기에 자손은 다들 애지중지하게 되는 것.



간혹, 사악한 인간에게 짐승만도 못하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한다하듯 짐승도 제 새끼만은 끔찍하게 여긴다. 반면 한국에서 근자 연달아 벌어진 아연실색할 사건들, 자녀를 학대하다 못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악스런 짓거리의 잔혹함에 소름이 돋는다. 다섯 살짜리를 살해한 뒤 암매장한 사건은 악독한 팥쥐엄마와 친부의 방조 아래 벌어졌다니. 친부모의 폭행으로 죽음에 이른 부천 초등학생은 시신마저 무참히 훼손당했다. 계모 학대로 숨진 여중생을 백골상태로 방치한 목사 아버지도 있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행할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그런 부모가 있는가 하면 가시고기나 거미는 자식에게 자기 자신마저 내어준다.



육이오 전쟁통도 아닌데 때아닌 고아는 왜 그리 흔히 생길까. 집을 잃어버리고 울며 헤매다니다가 보호시설에 수용된 경우도 있겠고, 애당초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길거리로 내쳐진 아이도 적잖다는 요즘이다. 부부가 이혼하면 짐이 된다며 서로 자식을 맡지 않겠다 하는 세태인 데다 미혼모도 급증하고 있는 추세다. 자식을 낳아놓고도 부모로서 책임질 능력도, 자격도 없는 부모들이 꽤 된다. 그렇게 양산된 고아들은 시설에 있어도 사랑에 굶주리게 되고, 그나마조차 벗어나면 뒷골목 음지생활에 편입되기 일쑤다. 다수는 입양을 꺼리는 한국인의 정서상 해외입양기관으로 넘어간다. 다른 형제들과 피부색이 다르고 눈동자가 다른 환경에 적응해 나가자니 아이들은 이중 삼중으로 힘이 들다. 게다가 제자식도 미운 일곱 살에는 야단치고 혼내기 예사다. 그조차, 다른 입지에서 당하는 아이는 차별대우 같아 서럽게 여겨질 터다. 그런 한국 입양아를 미국에서 자주 만나는데 그때마다 괜히 죄인 같이 움추러든다.



이 또한 못 말리는 나의 고질. 품고 있던 둥지의 알을 잃은 새의 우짖음에서 비롯된, 번다한 생각의 갈피들이 끝 간데없이 이어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은 허나 이쯤에서 멈추기로 한다. 어서 아침 준비하고 새로운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자. 쓸모없이 망가진 새집을 사진에 담는데 옆의 노란 장미가 저도 찍어달랜다.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