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소리가 나를 찾아왔다
그리움/1989
개구리 소리가 듣고 싶다. 봄밤을 완전 장악해 버리는 그 소리. 달빛 출렁이는 무논에서라면 더 좋겠다. 칠흑의 어둠 속이라도 개의치 않겠다.
쾌청한 한낮보다 어스름밤을 맞아 제 세상인 양 한껏 목청 돋우는 개구리 소리. 괄괄 괄괄괄. 숫제 소리의 소나기다. 소리의 폭포다. 충천하는 활력을 기세 좋게 분출해 대는 그 뱃심. 암팡진 위력으로 천지를 제압하려 드는 그 기개. 쭈뼛거림이 없다. 오만불손할 정도로 도도하고 당차다. 밤의 적요를 마구잡이로 휘젓으며 의기양양 내지르는 점령군의 함성이다. 일사불란한 힘의 결집인들 대단치 않은가.
마침내 들 전체를 갈아엎을 작정이라도 한 것 같이 와글거리는 소리. 그렇게 떼거리로 한밤 지새우는 개구리 소리가 듣고 싶다. 그 소리에 흠뻑 젖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다. 생각하면 싱겁고 어이없는 노릇이지만 이 갈증은 입덧할 때의 막무가내처럼 거의 외곬의 치달림이다.
별일이다. 하고많은 자연의 소리 중에 왜 하필 개구리 소리인가. 어찌 좀 잘 봐주려 해도 도통 고운 구석이 없는 소리, 생짜배기로 시끄럽기만 한 개구리 소리다. 그러나 건강하다. 주어진 한 생을 빈틈없이 채우려는 맹렬한 의지에다 지칠 줄 모르는 힘찬 생명력이 미쁘다.
자그만 몸 전체로 살아있음의 기쁨을 열정 다해 노래하는 개구리. 존재 증명의 집념이 그 이상 확고할 수 있을까. 타성에 빠져 매사가 시틋이 여겨지는 근자의 내 일상에 새롭고 강렬한 삶의 의욕을 샘솟게 할 것 같은 개구리 소리. 그리하여 처진 어깨 추스르고 활기차게 생활 앞에 서고 싶다.
자동차 소리에 한나절을 시달리고 나면 더욱 못 견디게 그리운 개구리 소리. 질주하는 차륜이 뱉어 내는 마찰음이며 울려대는 경적. 온 데 떠다니는 진동의 파장. 신경을 갉다 못해 이명으로 남는 소리소리들. 그렇듯 도시가 만들어 내는 소리에서는 각이 느껴진다. 딱딱한 직각과 날카로운 예각의 비정함이 화살 되어 마구 날아온다. 방어를 위한 초긴장. 불안한 바람에 품성마저 충동적이고 거칠게 되며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해지는 건 아닐까. 자연히 심성이 삭막해지고 황폐해질 수밖에 없는 조건들뿐이다.
독일의 한 환경의학 보고서에 의하면 거리의 소음은 스트레스를 일으키는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시키는데 큰 몫을 한다고 하였다. 음악의 위안마저 없었다면 산업사회의 더 많은 사람들은 조현증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싶다. 요즘 들어 인도음악 쪽에 경도되는 내 취향도 우연이 아니리라. 자연에 가장 가까운 리듬이라는 인도의 라가. 그 밖의 신명 나는 사물놀이 속 북소리도 좋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확실한 처방은 잠시나마 자연 품에 안겨보기다. 그리하여 날 선 귀를 순하게 다스리고 충혈된 시선을 맑혀 볼 일이다.
어쨌든 이번 주말에는 만사 제치고 도시를 떠날 참이다. 어디든 개구리 소리 흥건한 촌락에 들어 하룻밤 지새지 않고서는 생병이 날 듯하다. 첨예히 곤두선 신경의 촉수를 가라앉히고 위험수위에 육박해 있는 심신의 노곤을 풀기 위해, 스스로를 정화시키고 환기시키기 위해, 나는 개구리 소리 와글대는 곳으로 가야만 하겠다.
이른 봄. 한 덩이 우무질이 변해 올챙이 무리가 되고 다시 개구리로 모습 달리해 갈 즈음. 논둑의 들찔레는 연한 순으로 마른버짐 핀 아이들을 불러냈다. 완두콩이 통통히 살찌며 아카시아 주저리가 향을 터뜨리는 신록의 계절. 처마 밑 제비가 새끼를 치고 보리가 팰 무렵이면 아이들은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겨우내 갇혀 지낸 데 대한 반작용이듯 저마다 용수철처럼 튕겨 밖으로 내달았다. 삐삐를 한 줌씩 뽑아 들고 앵두와 오디로 앞자락 버려가며 물오르는 초목 되어 싱그러이 솟구치던 긴 긴 봄 하루.
그때에의 향수 때문인지 모르겠다. 자연에의, 고향에의, 유년에의 그리움 말이다. 잃어 가는 것들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지금은 그들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있는 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영원한 격리나 되는 것처럼 절실함으로 간절함으로 더해 가는 그리움의 度.
이 며칠 새 나의 안달은 극을 달했다. 성화 부리며 보채는 아이같이 개구리 소리가 듣고 싶어 마냥 몸살 앓았다. 생생한 그 소리를 듣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으므로 나는 개구리 소리를 만나러 떠날 것이다. 가서 개구리의 충만한 생명력을 내게도 전이시켜 보리라. 완전함을 위한 변태의 거듭을 내게도 적용시켜 조심스레 시도해 보리라. 또한 하늘을 날지 못함이나 꽃 위에서 노래하지 못함을 불평할 줄 모르는 자족의 넉넉함을 배워 보리라.
그리고 무엇보다 우선은 나를 정결히 세탁하고 충분히 해갈시켜 데리고 오는 일이리라. -89. 봄-
— 오래된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가
나는 한때 개구리 소리를 그리워했다. 이유 분명치 않음에도 몸살처럼 앓으며. 그 시절의 나는 도시의 소음 한복판에서 생명의 소리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살고 있었다. 소리는 넘쳤으되 살아 있는 소리는 도무지 아니었다. 그래서였으리라. 들판을 접수했던 그 소리, 밤을 통째로 흔들던 그 와글거림이 내 안 어딘가를 줄곧 두드리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리움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잃어버린 어떤 상태, 어쩌면 살아 있음의 밀도를 다시 찾고 싶은 욕구였는지도 모른다. 개구리 소리는 그저 자연의 한 소리가 아니라 삶이 가장 삶답게 끓어오르던 순간의 상징이었으므로.
오래된 그리움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그리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보니 이미 도착한 것이었다. 마음은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가. 지금 손에 잡히는 것보다 잡히지 않는 것들—그리움, 기억, 마음의 결 같은 것들이 더 오래 삶을 이끄는 강력한 주파수로 작동했던 건 아니었을까.
끌어당김의 법칙이라는 말을 요즘에 새삼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나는 진작부터 그 소리를 향해 살고 있었던 셈이다. 자꾸 떠올리고 계속 그리워하고 마침내는 찾아 나서겠다고까지 다짐하던 마음. 그 방향성이 어디론가 나를 데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절인연 맞닿아 그 소리는 바로 내 곁에 와 있다. 서른 일곱해 만에. 강렬한 삶의 의욕을 일깨우던 그 소리가.
— 마음은 무엇을 붙잡고 있었는가
서귀포 새섬에서 시니어 활동으로 일을 하면서 월~금요일까지 하루 세 시간씩 근무하고 있다. 그 덕에 아무런 노력 없이 와글거리는 개구리소리를 바로 곁에서 들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린다. 더없이 감사하게도. 어쩐지 잠재의식 혹은 끌어당김의 법칙이 작용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일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정확하고, 인연이라 하기엔 너무 오래 준비해 온 기다림이다. 마치 오래전 내가 던져 놓은 마음 하나가 우주선처럼 시간을 돌아 늦게사 내 곁으로 도착한 듯이. 그때 나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고, 지금의 나는 그 소리 속에서 하루 몇 시간을 충만하게 지내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그 사이에 놓인 시간은 단절이 아니라 시크릿에 가까운 비밀스러운 연결이었으리라. 보이지 않게 이어진 선 하나가 결국 나를 이 자리까지 이끈 것이니. 하지만 이것을 그저 끌어당김의 법칙이라 부르기에는 좀 거북스럽다. 내가 그 꿈을 끌어왔다기보다 어쩌면 내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로 천천히 이동해 온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살아 있는 생생한 소리를 원했고 삶의 기운이 충만한 자리로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이 맞아떨어진 지금, 그 소리는 더 이상 그리움이 아니라 일상이 되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우리는 자신이 오래 바라본 쪽으로 조금씩 이동한다는 것을. 크게 티 나지 않게, 그러나 틀림없이. 그러니 무엇을 끌어당기느냐보다 어디를 바라보고 사느냐가 더 근본적인 질문일 게다. 내가 매일 무심히라도 떠올리는 것, 자꾸 마음이 가는 그것이 결국 나를 그곳으로 데려갈 테니까.
—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요즘 그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생각한다. 아, 이것이었구나. 그토록 나를 갈증 나게 했던 이유가.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움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숙성돼 도착하는 것이었음을. 내가 오래 바라본 것은 결국 나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까지 걸어가도록 만드는 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보고, 듣고, 선택한다. 그 선택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나의 하루, 더 나아가 내 삶의 색깔이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란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 이처럼 이미 시작된 방향성에 대한 이야기일 게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지향하며 살아간다.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면 무심코 흘려보낸 생각이든 간에. 생각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했다. 우리는 생각과 감정을 통해 현실을 만든다. 즉 내면이 현실을 만든다. 여기에는 행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끌어당김은 생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건강해지고 싶다면 그 마음은 결국 걷는 발걸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건강해질 거야”라는 생각이 “오늘은 조금 더 걸어볼까”라는 행동으로 연결될 때, 그때 비로소 현실이 바뀐다. 삶은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각이 감정을 만들고 감정이 태도를 만들고 태도가 결국은 현실을 불러온다. 인지-감정-행동-결과, 라는 순환 고리의 핵심대로다. 밭에 씨를 뿌리듯, 우리는 매일 생각을 심는다. 문제는 무엇을 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수확만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