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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3. 2024

이제 앞으로 100킬로

카미노 스토리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100킬로미터 앞이다.

다른 코스로 걸어온 순례객도 모여드는 데다 사리아부터는 이래저래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고 있다.

오래 걷지 않은 티가 나는 말끔한 차림새에 배낭은 작아도 저마다 스틱 등 장비만은 제대로 갖췄다.

짧은 구간 걸을수록 어서 빨리 카미노의 종점에 다다르고 싶은 마음이라 발길 급해지는가, 죄다 들 바쁘다.

병목현상이 나타나는 도로처럼 어느 결에 길을 걷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룰 정도로 많아져 호젓함도 사라졌다.

그런만치 눈에 띄진 않지만 숙소 경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다.

어둠살 채 가시기도 전에 새벽같이 배낭을 꾸리는 등 가급적이면 일찍부터 출발을 서둘러댄다.

하루하루 목적지가 가까워진다.

길가 도로 표시판의 숫자가 차츰 줄어들며 88Km... 70Km... 50Km부터는 거리 표식이 아예 생략된다.

이제 걷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800킬로 카미노 프란세스를 구간으로 나눠 기회 될 때마다 와서 걷고 순례 완료하는 경우가 흔한 유럽인.

그에 반해, 바다 건너 대륙에서 큰맘 먹고 온 사람들은 한번에 끝낼 욕심으로 무리를 한다.

하여 실제 전 구간 '순전히 걸어서 완주'하는 케이스는 반 정도라 한다.

그 나머지 반에 해당되더라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 길에 올랐었다는 자체만으로도.

처음 길을 나설 때의 설렘과 조급함은 거의 다 닳아서, 삭아서 없어지고 자연을 관조하며 느긋하게 걸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주변을 둘러보며 서두름 없이 넉넉한 마음으로 걷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젊어서는 온갖 인연과 숫자에 얽매인 데다가 시간과도 경쟁 벌이며 앞만 보고 급히 내달았다.

지금 이 나이엔 만사 바쁠 것도 없다.

지닌 것 하나씩 내려놓고 마음 비워가며 보조 천천히 걷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시기에 이르렀으므로.

카미노 길의 배낭 무게도 제법 줄어들었다.

비상식량은 거진 소비시켰고 비누는 닳아서, 샴푸는 바닥이 나 짐무게를 덜어줬다.

화장품은 애당초 쓰일 일이 없다 하여 준비 안 했기에 세수하고 로션 쓱 문지르면 끝.

새벽어둠 속에서 길 나서니 선블록도 챙겨 바를 짬도 없을뿐더러 눈썹 그리고 루즈 바를 겨를 없어 늘 민낯이다.

다들 생얼인데 주름진 얼굴 톡톡거리며 굳이 유난 떨 계제도 아니었고.

이제 목표점은 바로 눈앞이고 시간은 널널하니 도무지 급할 게 없어 걸음걸이 한갓지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매사에 느긋, 숙소 미리 예약 잡아놓으려 안달 부리지 않아도 무방하다.

구태어 쉼터에 신경 쓰지 않고 쉬엄쉬엄 가도 되는 것이 알베르게 만원이면 호텔도 있고 민박도 있다.

갈수록 도회지라서 행여나 잠자리 구하지 못하고 길거리잠자게 될까 걱정은 아니해도 된다.

<홀가분한 배낭에 반려견 두 마리 데리고 걷던 젊은이>         

<인생길 동반자끼리 항상 손잡고 걷던 아일랜드 부부 >

오늘은 멜리데까지만 걷기로 한다.

제법 가풀막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오솔길 벗어나 한없이 너른 들판을 지나서 담장에 이끼 잔뜩 낀 촌가도 스친다.

산에는 유칼립투스 우거졌고 초지엔 목장 널널하게 펼쳐졌으며 작은 마을 길가엔 순한 개와 고양이와 암탉의 꼬꼬댁 소리 어우러진다.

갈리시아지방의 특징이라면 한두채 집이 들어선 고을이라도 동구밖에 바위 다듬어 대형 십자가를 세워놨다.


예외 없이 석조 성당이 있으며 순례자들이 묻힌 공동묘지가 자리 잡았고 오레오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카사노바(Casanova)라는 동네의 흥청거리는 분위기와도 만나고 알베르게의 어둑신한 바가 눈짓을 보내기도 하는데,

아마도 도착지 가까워진 객들의 긴장 푼 틈새를 공략하는 모양이다.

휘적휘적 걸으며 샘터에서 물도 마시고 낡은 성당에도 들어가 보고 촌집도 기웃거리다 보니 어느새 멜리데(Melide) 입구.

로마시대의 다리 앞에 도착했다.

돌다리 너머로 옛 위세 잃어가는 허물어진 성과 오래된 광장의 위풍당당한 산페드로 대성당 돔이 보인다.

                 <알베르게 숙박비 영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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