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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4. 2024

지하철로 부산 골목 탐방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전국 각처에서 일 년씩 살아보기로 작정했다.


맨 처음 깃든 곳은 전에 살았던 부산이다.


흘러간 인연이나 지난 세월을 반추하며 에 연연하는 대신 자유인답게 부산 곳곳을 부담 없이 읽어보기로 했다.


열여섯 해를 살았으니 손바닥에 그릴만치 익숙한 지역이나 웬걸, 안 가본 곳 천지였다.


산 좋고 교통 편리한 금정산 아래 온천장역 부근에 머물며 날마다 전철을 탔다.


팬데믹 이전으로, 지하철을 이용해 부산 구석구석 골목 탐방을 다녔다.


골목기행 중에 코로나가 터져 한적한 바닷가로 은거지를 옮기기 전까지 골목투어는 계속 이어졌다.

부산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중앙역에서 내렸다.

40계단이 첫 번째 목적지였으므로 11번 출구로 나왔다.

인근에는 40계단 문화관광 테마거리 금속 조각이 마중 나오는 등 볼거리가 수두룩한 곳.

가까이 백산기념관이 있으며 부산 광복기념관, 영화체험 박물관, 옛 미 문화원 자리에 부산근대역사관도 문을 열었다.

바로 위쪽 전망 최고인 용두산공원에서는 종일 충무공이 남해를 지키시는 발치에 꽃시계 초침은 돌아가고 있다.


거기서 언덕길 넘어서면 대청동으로 중앙성당이 기다린다.

대청동에서 광복동까지 옆으로 바짝 국제시장이 드넓게 이어졌다.

남포동을 건너면 자갈치시장이 나오고 영도다리가 보인다.


40계단에 올라 건너다보면 맞은편에 높은 빌딩들이 즐비하다.

그 뒤로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과 부산 항만공사가 나온다.

바다 위에 뜬 부산항 대교가 멀리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예전 시청 자리에 롯데백화점이 서있다.

그쪽 방향에 부산대교와 영도다리도 잇따라 나타난다.



50년대 초 피난시절 당시 부산.

화재가 나기 전, 구 부산 역사가 가까이 있었기에 자연 피란민들이 총총 모여들었던 언덕배기에 그 계단이 있다.

40계단은 부산항 부두나 부산역에서 날품을 팔던 피란민들이 고지대에 얼기설기 지은 판자촌 집으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원도심인 이곳을 중심으로 난민촌이 형성됐으니 늦게 도착한 사람들일수록 영도로 아미동으로 감천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생활 터전과 지리상으로 가까워 여건상 그나마 가장 먼저 기반 잡고 되일어날 수 있었으니 그 점 요행수를 잡았다 할 수도 있겠다.

피란 떠나며 꼬불쳐 품고 온 가락지를 팔고 구호물자 밀가루를 사 오는 국제시장이 지척이기도 한 데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전쟁통에 가족과 헤어지면서 부산에 도착하면 영도다리나 40계단에서 만나자고 단디 약조를 했더랬으니까.

원산에서 흥남부두에서 생이별한 피란민들의 상봉 장소가 이 근방이었기에 그들은 이 주변을 허구한 날 헤맬 수밖에 없었다.


원래 이 지역은 중앙로까지 물이 밀려오는 바다였다고 한다.

해안을 매축해 시가지를 만들고자 1902년 공사를 벌여 새로운 땅이 확보되자 중앙동 일대를 새마당이라 불렀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중앙동 한 예식장 이름이 새마당예식장이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온통 으리번쩍한 고층 빌딩이 숲을 이뤘지만 반세기 전만 해도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락이 딱 어울렸다.

부산은 임진란의 비극에서부터 해방되며 돌아오는 귀환동포들 눈물바다 이룬 곳이고 임시 수도의 고달픔이 새겨진 곳이다.



고달픈 피란살이 애환 서린 이 동네는 처량스러운 아코디언 소리가 어울리는가, 계단 중턱에 걸터앉아 아코디언을 켜는 남자.

나로서도 부산 중구 동광동 5가,  40계단 이 근처는 별로 낯설지가 않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그때도 동광동은 인쇄골목으로 불렸다.

아직도 골목마다 인쇄공장과 출판사들이 즐비하게 박혀있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인 곳도 있고 인테리어에 신경 써 약간 세련된 출판사도 있긴 했다.

일요일이라 문을 닫아 골목길은 조용했지만 전에 책을 펴낸 출판사 간판도 보였다.

부산시 문예창작기금을 지원받아 책을 냈기 때문에 첫 번째 빼고는 모두 부산권에서 찍었다.




요즘처럼 컴퓨터 시스템이 출판 과정을 전담해 준다면 출판사 자주 들락거릴 일이 없을 터.

하지만 당시는 활자 하나하나를 활자공이 집자해서 쓰던 활판인쇄 시대였다.

고전적인 아날로그 방식이라 공장 안에서는 윤전기가 철거덕거리며 돌았다.

오탈자가 많이 나와 여러 번 교정을 봐야 하는 데다 편집 디자이너가 달리 없던 때였다.

본문의 레이아웃은 물론 표지 작업까지 직접 해야 했으니 어쩌면 보람은 더 있었다.

원고 뭉치 넘긴 다음 페이지 수와 활자 크기를 정하고 교정작업만도 최소 세 번은 해야 하는 등등.


출판사 문턱 닳도록 드나들면서 몇 달 기다려야만 책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불과 삼 사십 년 전 일이 아득한 옛일 같다.


일일이 우편으로 부쳐야 하는 증정본 무겁게 들고 갔던 중앙우체국은 반갑게도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때 주변 식당 이용도 더러 했는데 단골로 가던 생대구탕집은 찾을 수 없고 일본풍 식당이 늘었다.

이 동네엔 시인이 운영하는 출판사도 있었기에 이래저래 부산 문단사람들 모임이 자주 열리곤 했다.

만일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아니다.

나이 든 지금 이대로가 걸리적거리는 거, 신경 쓸 거 없으니 만고 편안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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