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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4. 2024

헝가리 의사, 1907년 한국을 담다

대청동에 있는 부산근대역사관을 찾기로 한 것은 특별 전시회가 눈길을 끌어서였다.

폰에서 길 찾기 검색을 해둔 터라 지하철 중앙동 역에서 내다.

길을 안내하방향 따라 대청동 쪽으로 올라와 역사관 근처까지 분명 다 왔다 싶은데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다.

주변 식당이나 지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하나같이 모른다는 답변이다.

도로변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여럿에게 문의했으나 근대역사관을 아는 이가 전무하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맴맴이를 돌다 돌다 하는 수 없이 역사관으로 전화를 걸었다.

두리번거리며 서있는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베이지색 건물이 보인다고 했다.

몇 발짝 걸으니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역사관, 마치 귀신에 홀린 거 같았다.

어처구니없게도 왜 큼다막한 입간판조차 안 보였던 걸까.

그전에 데모대에 의해 방화사건이 발생했던 미 문화원이 바로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

나이 든 이들은 당연히 미 문화원으로 알고 있는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때 지어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사옥으로 쓰였다.

해방 후 미군이 접수해 처음엔 병사 숙소로 이용하다가 뉴 밀레니엄 이전까지 미 영사관과 문화원으로 사용된 단독 건물이다.

그런만치 위치를 안내할 때 옛 미 문화원 자리라 하면 누구나 단박 알아들으련만.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만 서른다섯 해 식민지 시대와 미국과 우방에 의해 겨우겨우 나라를 유지해 온 약체의 대한민국이었다.

부끄러운 과거의 치부인 역사적 실체를, 그 현장을 감추려는 데만 급급해서인가.

그보다는 사실 그대로를 뼈아프지만 인정하고 올바로 직시, 오히려 그 자리의 역사적 상징성을 부각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하였으며 지나간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으면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게 된다했거늘.

이 이상 무섭고도 두려운 말이 달리 어디 있겠는가.




코로나 정국이라 인터넷 예약제, 시간대 별로 제한된 인원만을 입장시키기에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대한민국의 혼란스러운 역사와 부산의 근현대사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는 교육 공간이라는 부산근대역사관.   

이 건축물은 이오니아식이 도입된 장중한 단일건물로 철근 콘크리트 3층에 대리석을 사용해 지은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9호다.

2003년에 개관했다는데 인근에서조차 존재는 물론 위치 깜깜이인 역사관, 어찌 그리 홍보를 미흡하게 했는지.  

시 산하 부속기관이라 시설관리에 있어 아직도 구태의연을 벗어나지 못한 채 방만하고 안이하게 대처하는 행정력이 문제일까.    

역사관 1층은 사무실 및 자료실이며 2층부터 부산의 근대사를 시대별로 나누어 빛바랜 과거사를 전시하고 있었다.

3층 전시실은 근현대 한미관계, 일제강점기 부산의 거리를 재현해 놓았으며 특별 전시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왜관과 최초의 전차길 피난민촌 등등 그렇고 그런 조형물들은 진작에 식상한 터.

특별 전시 중인 <카메라를 든 헝가리 의사 보조끼 데죠>의 사진과 일기를 둘러본 소회만을 풀기로 한다.


위 사진은 치료를 받으러 배를 타고 몰려든 거문도 어민들 행렬과  밀도살한 개고기를 파는 난전에  배만 볼록한 벌거숭이 꼬맹이들 사진 애처롭고 서글프기만.


이게 적나라한 백여 년 전 우리네 실상이다.


지금은 헝가리쯤 우습게 여기며 기고만장  거들먹거리지만 국제정세 한바탕 요동치면 한순간에 급적직하되기도 하거늘.

보조끼 데죠는 부다페스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04년부터 해군 소속 군의관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는 1907년에서 2년 동안 프란츠 요제프 1호 범선을 타고 동아시아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태에 걸친 색다른 여정 중에 그가 만난 풍경과 사람들을 꼼꼼스레 글과 사진으로 남겨 놓았다.

일기 중 이런 기록도 있다.

"조선인들은 위엄이 느껴지는 하얀 옷을 입고 심각한 얼굴에 긴 담뱃대를 들고 있었다."

"해밀턴 항(거문도)에 배가 들어서자 조선의 작은 어선들이 주위를 에워쌌다. 흰옷을 입고 원통 모양의 모자를 쓴 사람들이 의사를 찾느라 어수선했다. 나는 진료 기구와 붕대를 가지고 조선인들이 타고 있는 어선으로 직접 내려가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한양에 온 우리 일행은 덕수궁 옆에 위치한 프랑스인이 운영하는 팔레스 호텔에 묵으며 궁궐을 여행했다. 주인 없는 경복궁 마당의 연못에는 잡초만 무성하여 모든 것이 죽음을 연상시켰다."

이렇듯 글과 사진은 훌륭한 역사기록이 되어 아득히 멀어진 그때 그 시절의 일상과 복식문화등을 생생하게 증언해 준다.

조선왕조실록이 세계문화유산 되듯 바로 그 보편적 가치를 지닌 기록물과 사진의 진가.


그 점 예술 이전에 보다 큰 의미를 갖지 싶다.


보조끼는 귀국한 다음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며 1911년 그간의 여행경험기록인 <동아시아에서의 2년>을 펴냈다.

그는 86세로 눈을 감기 전 자신의 사진 앨범과 일기 등 유품을 홈 페렌츠 동아시아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중 일부인 조선 편이 금번 특별 전시회에서 부산 시민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다.

그 덕에 파란곡절 많았던 1900년대 초의 조선 모습 및 백성들의 생활상을 일목요연하게 접할 수 있었다.

역사관 건물에는 처음부터 설치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3층 벽 한구석에 자그마한 구식 엘리베이터까지 갖춰져 있었다.

전시물 중 낡은 책자나 일용잡화 외에는 대부분 영상물과 모형 등이라 알뜰히 폰에 담아왔다.

1900년 초 보조끼가 사용한 카메라다.

주소: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동 2가 대청로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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