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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5. 2024

중앙역 10번 출구는 연안여객터미널 입구

부산 지하철 1호선 중앙역 10번 출구를 빠져나오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과 직통으로 연결된다.


이 터미널을 이용, 연락선을 타고 오사카며 야마구치며 대마도를 다녀올 수 있다.


물론 부관 페리를 타면 시모노세키로 향한다.


관 연락선, 하면 퍼뜩 떠오르는 이름이 조선 최고의 소프라노 윤심덕이다.

그녀는 최초의 관비유학생으로 동경에서 우에노 음악대학을 다닌 신여성이었다.

당대의 스타였던 그녀는 현해탄을 건너던 배 위에서 연인 김우진과 투신해 서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삼일운동 직후, 독립에 대한 뜨거운 열기가 꺾이며 의기소침에 빠진 1920년 당시 정서는 이러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탄식하 듯한 이 노래는 한 소절만 들어도 눈가가 붉어진다.

'울 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애절함을 넘어 애수 짙은 멜로디에 한숨이 푹 쉬어진다.

급기야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삶이 허무뿐이라며 염세적인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스스로 작사도 했다.

봉숭아 노래는 공교롭게도 윤심덕이 처음 발표했는데,

바이올린을 켜는 작곡가 홍난파와 가수 윤심덕은 전부터 염문을 뿌리는 사이였다.

홍난파의 아버지는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을 지낸 홍준으로 한글성서 번역 작업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 가정에서 자랐지만 자유분방한 예술가였던 그는 도중에 사상 전향을 하며
친일행위를 함으로 친일파라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윤심덕과 홍난파 그리고 김우진.

목포 갑부집 아들에 극작가였던 동갑내기 김우진은 유부남이었다.


하필 그녀는 그와 밤바다로 낙하하며 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란 가요가 일본에서 대단한 인기곡이라고 하였다.

인기를 넘어 일본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다고 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이 가사 속의 내 형제는 재일동포를 가리킨다고 작사가는 밝혔다.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떠난 후 헤어진 그리운 혈육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조용필이 애절하게 부산항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자 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 때 부산에서 누린 온갖 호사를 떠올릴 거라던가.

그때에의 향수에 젖어 부산에 돌아가고 싶다는 내면의 동요가 일며 격하게 반응할 법도 하다고 누군가는 평했다.

제법 그럴싸하게 들린다.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세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색 진 수미르 공원에 가니 거기서도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낚시질하는 누군가가 미동도 않는 찌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무료한 듯 흥얼대고 있었다.

유행가 가락이 거슬리긴 했지만 물과 용이 노니는 수미르공원에서 바라보는 전경은 아주 멋졌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처럼 조가비 모양의 둥그런 지붕을 인 해안가 터미널 하얀 건물이 건너다 보인다.

사장교 형식의 부산항 대교가 보여주는 세련된 모습도 또렷이 잡힌다.

영도 봉래산이 마주 보이고 그 발치에 어지러운 조선소 대형 크레인과 선박들, 부산대교와 영도다리 한켠도 드러난다.

가까이 유람선이 정박해 있고 제주행 연락선과 부관훼리도 휴식 중이며 범선인 누리마루호는 연안에 바짝 붙어있었다.

탁 트여 시원하고 너른 수미르공원을 몰라서일까,

인근 지하도 상가 침침한 데서 눈치 보며 죽치고 있는 노인네들에게 수미르공원을 알려주고 싶었다.  


부산항과 시모노세키항을 오가는 부관연락선.

1905년 일본은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 운행을 시작했다.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국책 해운회사를 개설해 수많은 한국인들을 북해도 탄광으로, 태평양 전쟁 시 총알받이로 징발해 갔다.

일본이 패전 기운 농후해지자 관부 연락선은 두절되었고 광복이 된 뒤 한일 간의 국교가 정상화될 때까지 연락선은 끊겼다.

1964년 처음 일본에 간 아리랑호를 시작으로 다시 운행이 재개된 관부 연락선.

시모노세키 외에도 일본 취항 배편은 오사카며 대마도의 이즈하라로 가는 여객선이 부산항에서 출발한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엔 하루 한 차례씩 2만 톤 급의 큰 배에 매일 관광객을 가득 실어 날랐다.

재작년 배를 타고 난생처음 일본이란 나라로 여행을 가 야마구치현이란 곳을 다녀온 적이 있다.

부산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저녁 여덟 시에 출발, 한숨 자고 일어난 이른 아침에 벌써 시모노세키에 닿아있었다.

배를 타고 하루 만에 여행할 수 있어 부담 없이 일본 드나드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생각보다 그 수효는 많았다.

심지어 생필품 중 공산품은 일본 왔다 갔다 하며 조달한다는 얘기까지 들었는데 현장에서 접해보니 사실이었다.

서울에서 왔다는 젊은 팀은 쇼핑 차 일본 드나드는 거라며, 사 가면 후회하지 않을 아이템을 추천하기도 했다.

오래 전인 80년대, 일본 여행 다녀오던 주부들이 단체로 코끼리 밥통을 사 온 사건이 생각켜졌다.

일본이라면 이를 가는 국민 정서도 왜 일본 물건 앞에선 여전히 맥을 못 추는지.

하루에 왕복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두 나라, 거리상으로는 매우 가까우나 질곡의 역사로 인해 외면하게 되는 나라 일본.

헌데 코로나로 직격탄을 맞은 여행업계, 그로 인해 부관페리를 타려고 그리도 북적거리던 터미널이 텅텅 비어있었다.

개미 새끼 하나 안 보이는 완전 나의 독무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맘대로 사진 찍기는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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