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y 25. 2024

'임정 36호'를 아세요?

주황색 도시철도 1호선을 탔다. 중앙역에서 내려 부산우체국 출구를 통해 지상으로 나왔다. 오늘은 생소할 수도 있는 부산의 독립운동가 한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평생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부산의 독립운동가였으나 교과서에 나오지 않아 아는 이 별로 없는 분, 백산선생. 교육자, 언론인, 실업가이자 독립운동가로 활약을 한 백산 안희재 선생이다. 부산지역에 산다 해도 역사에 관심 없으면 귀에 들지 않아 모르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민족교육의 선각자이며 민족언론의 선구자였는가 하면 민족기업 육성에 전력을 기울여 임정에 독립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
지도자인 白山 安熙濟 先生. 오래전 신문사 문화부에서 부산역사기행을 연재하면서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백산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어 진작에 찾았던 곳이다. 선생의 손자도 신경외과 닥터로 오랫동안 아들과 같이 일하는 지라 아들과 더러 백산선생을 화제 삼아 얘기 나눴던 터였다. 안선생은 훌륭하신 조부님 음덕의 힘으로 무탈히 어려운 공부 잘 마쳤나 보다,라고...



부산에 노년의 닻을 내리고 여기저기 부산 인근을 구경 다니는 중에 문득 백산기념관이 궁금해졌다. 늦은 오후 중앙동에서 기념관을 찾아가려니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야 할지 헷갈려 물어물어 겨우 동광동 출판거리로 접어들었다. 비좁은 골목길을 서로 스칠 듯 아슬아슬 지나가는 차량과 오토바이, 양켠 도로를 따라 빼꼼한 틈새도 없이 식당들이 즐비했다.



초록색 삼각형 피라미드 모형이라 외관이 꽤 독특한 기념관 주변은 스산스레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부산권 독립운동가의 기념관으로 삼일절이나 광복절 행사 때마다 조명을 받지만 그 외엔 과히 주목받지 못하는 백산기념관. 이 날도 방문객은 물론 문화해설사도 없었고 노인 둘만 자리를 지켰다. 관광인구가 많은 광복동 주변이라 관광안내문 따라 외지 관광객이 들어올 수도 있는데 기념관 관리가 이리 허술할 수 있나 좀 어이가 없었다.



전시장을 지키는 분들은 정식 근무자나 전문해설사가 아닌 듯 차림새부터 허름해 보였다. 외지인이 맘먹고 찾을 수도 있을 텐데 안내가 이리 허술해서야 기념관의 격을 떨구는 것 같아 마음 쓰였다. 백산 안희제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1995년 24억 원을 들여 중구청이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조성한 기념관이나  매우 협소한 편이다. 원래 백산상회 자리에 짓느라 그런 건가. 게다가 어째 삼십 년도 안된 건물이 누추하고 을씨년스럽다는 인상마저 드는 걸까. 들어간 공력에 비해 내용이 빈약해 보이기도 하는 데다 시설운영도 부실해 여기저기 하자가 거슬리게 눈에 띄었다. 기념관 운영체가 만일 백산선생 후손이라면 이 정도로 관리에 무신경하지는 않으리라.



기념관 내부는 지하 1, 2층이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1층 입구에는 백산 안희제 선생 흉상이 찾아오는 객을 묵묵히 맞았다. 1층에는 연보와 친필서한을 비롯해 책과 도장 등 유품과 독립운동 자료 80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1885년 경남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한 안희제 선생은 일찍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매우 영민할뿐 아니라 문장에도 능했던 선생은 19세 되던 해 남도 일대를 유람하며 32수의 한시를 지어 '南遊日錄(남유일록)'에 남긴 바도 있다고 한다.



이 무렵 조선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았다. 러일전쟁 승전 직후 일제는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 체결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해 버렸다. "나라가 망해 가는데 선비가 어디에 쓰일 것입니까. 山林間에 숨어서 어찌 부질없이 글귀만 읽고 있겠습니까." 경성으로 올라가 세상에 맞는 학문을 익혀 국민 된 도리와 직분을 다하겠노라 어른들께 고하고 집을 나섰다.

1905년 보성전문과 양정의숙을 다니던 선생은 쓰러져 가는 국운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민족의 동량이 될 청소년 교육이 급선무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구포에 구명학교와 향리에 창남학교를 설립, 신학문 보급에 힘썼다. 안중근의사 하얼빈 의거를 계기로 1909년 10월에는 徐相日 등 80여 명과 함께 안창호 계열의 비밀 청년결사대인 대동청년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이듬해 선생은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던 러시아와 만주를 돌며 독립군 단체들과 만나던 중,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귀국을 서둘렀다. 그 해 선생은 해산물, 면포, 농산물을 취급하는 부산 최초의 무역회사인 백산상회를 설립하였다. 당시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상업수단의 일환이자, 그 조직망은 독립운동 정보처 역할과 연락망으로도 활용되고 있었다. 백산상회는 겉으로는 단순한 무역상이었으나 미국 중국의 첩보조직과 계를 맺고 독립운동의 주요 연락거점 역으로 임정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특히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조달하는 '임정 36호'의 국내 책임자인 백산선생은 임정 운영자금의 60%를 조달했다고 한다. 선생은 국내 갑부나 주요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모금한 돈을 임정에 전달하는 일을 도맡았다. 경주 갑부 최준은 자의로, 때로는 백산의 강권에 의해 엄청난 액수의 독립자금을 내놓으면서 그 돈이 모두 상해 임시정부로 전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해방 뒤 김구와 만난 최준은 백산에게 전한 돈과 김구가 받은 돈 장부가 일치함에 감격, 친구를 의심한 데 대한 미안함으로 백산이 묻힌 경남 의령을 향해 절을 하며 통곡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백산은 1919년 2월 파리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파견된 김규식 일행의 여비 일체를 지원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3. 1 운동이 일어나자 향리 조카에게 일러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며 시위를 독려하였다. 그해 11월에는 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전도유망한 인재들을 선발해 외국에 유학시켰는데, 기미육영회를 통해 키워낸 인물 중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건국 과정에서 몇몇이 중추역할을 맡았다고. 국민을 교육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어찌 급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이는 기미육영회 취지문에서 밝힌 내용이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국민계몽운동의 연계선상에서 언론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4월에는 동아일보의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으로 활동도 했다. 1926년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를 인수한 다음 중외일보로 명의를 바꿔 발행자가 됐다. 국민들을 각성시켜 깨어나게 하고자 널리 언론 사업을 펼쳐나갔다. 러시아로 망명해서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신보를 간행한 바도 있다.



1931년 단군을 신봉하는 민족종교인 大倧敎에 입교하여 조국 독립에 헌신할 마음가짐을 더욱 굳건히 다졌다. 1933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마련과 조선 소작농들의 자립을 위해 발해농장을 건립, 농민 3백 호를 유치하고 농장 내에 발해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백산은 틈이 있을 때마다 애국지사인 성재 이시영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으며 안창호, 신채호 등 우국지사들과 만나 항일구국의 투쟁 방안을  이마 맞대고 논의했다.




백산은 민족 고유의 종교를 통한 민족정신 고취에 힘썼으나 1942년 11월 일제가 대종교를 독립운동조직으로 지목해 대종교 지도자들을 일거에 체포했다. 그 바람에 잔혹한 고문을 받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출감하자마자 순국하였다. 국권회복과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항일애국지사 백산(白山) 안희제 선생은 조국광복을 2년 앞두고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는 기념관 내의 연보를 참고 삼았다.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하며 나라와 겨레 위해 일생을 바친 백산의 공적을 기렸다. 그러나 가정생활 특히 부인의 삶은 오죽 신산스러웠을까. 일생을 가슴 졸이며 지아비를 먼산바라기 하듯 기다리는 한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지. 나라사랑의 방법은 저마다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겠다. 요즘 갈등과 혼돈에 빠진 이 나라를 위해 조용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들을 통해 대한민국이란 화롯불을 되살릴 희망의 불씨를 본다.

백산기념관 위치: 부산광역시 중구 백산길 11(동광동3가)

작가의 이전글 부모님 모시고 들릴만한 생각하는 정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