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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5. 2024

부모님 모시고 들릴만한 생각하는 정원


하늘 향한 천심이다.

하늘 향한 농심이다.

1968년부터 지성스러운 손길로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을 품었다.

오로지 자연과 하나 된 성원장은 한마음으로 무수한 일월 응축시킨 작품을 다듬어왔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수행하는 자세로.

생각하면서.... 사색하면서...

하늘 향한 돌탑 쌓아 올리듯.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곰곰이 숙고해 볼 것도 없었다.

얼핏 만 봐도 단박 알 수가 있었다.

여기에 응축된 일월이 무릇 그 얼마였을지는.

국가지정 민간 정원인 생각하는 정원의 시작은 1968년부터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 돌덤불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곶자왈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성범영원장은 이 정원의 기초를 닦았다.

일찍이 감귤 관엽식물 분재를 재배하는 청원농장으로 출발해 1992년 분재예술원으로, 다시 생각하는 정원으로 재탄생시켰다.

반세기 넘는 유구한 세월 동안 분재 하나하나마다 손수 가지 고르고 직접 순 다듬어 줬다.

거친 땅에다 될성부른 나무를 골라 심고 가꿔가는 한편 좋은 돌이 나왔다 하면 어디고 달려가 구해왔다.   

돌담을 쌓기 위해 억척스레 돌을 져 나르며 전신만신 다치기 일쑤였다.

외부와 격리시키듯 석성처럼 담장이 견고하고도 높게 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제주의 거센 바람으로부터 분재와 귀목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적재적소에 안배된 연못과 폭포는 잘 설계된 프로의 작품이 아니라 성원장이 직접 구상했다니 미적 안목도 뛰어나다.

오름을 형상화한 나지막한 언덕 사이로 수천 점의 분재와 고목과 수석이 각각의 역사를 갈무리고 있는 생각하는 정원.

정문 들어서면 관람로 따라 환영의 정원, 영혼의 정원, 영감의 정원, 철학 정원, 감귤 정원, 비밀 정원, 평화 정원이 이어진다.


이날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늘 청명하다가 느닷없이 비구름 몰려들어 우박처럼 굵은 빗방울 후드득 쏟아졌다.

생각하는 정원 거니노라니 기상도까지 저절로 사유하고 묵상하고 반추하게 만들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기에 나오는 말이다.

한편, 아무리 크고 위대한 일이라도 시작이 있어야 하고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마침내 이룰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개인정원이자 대한민국 대표정원이며 한국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중국 9학년 교과서에 실린 이곳.

장쩌민 주석이 ‘정부 지원 없이 혼잣손으로 세계적인 공원을 일궜는데 그 개척정신을 배우라’는 지시를 해서라고.

이 모두가 우공(愚公)의 피땀과 아울러 꿈과 집념이 이루어낸 아름찬 결실이리라.

그가 처음 제주에 와서 황무지를 개간해 심은 나무는 밀감나무를 비롯해 정원수인 동백나무와 소철이었다.

제주 농가에서 효자나무 대학나무로 불리던 밀감나무를 과감히 밀어버리고, 오래 계획했던 분재정원 만들 생각을 구체화시켰다.

줄곧 머릿속에 그려온, 가장 한국적이면서 제주도 분위기에 어울리는 분재정원의 윤곽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제주도의 특징인 오름을 살려서 정원을 꾸며나가면서 곳곳에 연못과 작은 폭포도 배치시켰다.

여러 어려움 극복해 내고 끝까지 노력한 결과 천오백여 점의 분재와 1만여 그루 정원수를 보유한 대한민국 민간정원 1호가 되었다.



이 날도 그는 여전히 전지가위를 들고 철제 디딤대 위에서 한그루 향나무 아래서 웃자란 가지를 다듬어주고 있었다.

머리와 눈썹까지 하얗게 센 신선 같은 노인장이나 허름한 입성에 모자 덮어쓴 영락없는 농부, 그것도 현역 농부였다.

그는 자연의 섭리대로 사계를 살아가는 나무를 통해 많은 깨달음과 진리를 배워왔다고 고백한다.

향기 그윽한 꽃에는 저절로 벌과 나비가 찾아오기 마련이나 아직 여길 모르는 이도 있을 터다.

부모님께 선물하는 감동이 있는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면 제주여행 시 스피릿 가든 코스는 마땅히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한 시절 기품 있는 분재와 수석 한두 점 문갑 위에 올려놓고 완상 하는 골동 취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조선백자나 분청다기와 함께 사군자나 묵화 족자라도 걸려있어야 서권기 머금은 기품으로 환치되기도 했다.

다향 흐르고 문자향 풍기는 사랑방 서탁 위에 한 점 수석 올려놓고 눈 가느스름 뜨고 음미하며 선비연하던 당시.

문방사우와 더불어 귀한 소장품인 고매 분재나 용틀임한 해송 분재 역시 그 자리 담소감으로 격에도 어울렸다.

그렇듯 독창적이고 균형 잡힌 멋스러운 분재(盆栽)는 호사가의 취미를 넘어 예술작품 반열에 들며 수 억을 홋가했다.

이곳 정원에는 살아있는 줄기와 죽은 줄기가 서로 어울려 휘감고 있는 절묘한 주목, 뿌리 부분 하얗게 드러난 곰솔 휘굽은 몸체 등 귀물이 다수 보였다.

버겁도록 큰 모과를 달고 있는 모과나무, 화산석 틈새에서 자란 팽나무, 현무암과 한 몸이 돼 돌을 껴안은 채 자란 느릅나무도 있었다.

의외로 느릅나무 분재가 많아 새삼스러웠는데 한때 귀찮게 여겨 괄시를 했던 느릅나무가 이리 훌륭한 분재감이라니.

랭커스터에 살 때 우리 동네 이름이 Elm, 곧 느릅나무골이어서인지 온데 지천이다시피 느릅나무가 흔했다.

훤칠하게 자라 목재감이 되긴 그른 수형에다 자잔한 잎 볼품도 없어, 느릅나무 싹이 돋으면 가차없이 뽑아버렸는데.  




오늘날의 생각하는 정원은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게 됐을까.

1939년 용인 출신인 성원장은 제주를 고향으로 둔 군대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그 인연으로 제주에 정착하게 됐다.

초겨울인데도 따뜻한 기후와 짙푸른 바다에 매료되었으며 노란 밀감밭과 들길에 피어나 한들거리는 유채꽃에 사로잡혔다.

분재는 자식 기르는 것과 똑같다는 그.

그만큼 지극정성을 쏟아야 한다는 얘기다.

흔히 분재를 ‘자연의 축소판’이라고 하나 자연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라는 지론대로다.

돌 하나 또는 나무 한 그루를 정원에 자리잡게 할 때마다 그는 수십 번, 수백 번씩 생각 거듭한다고.

정원 전체의 구도는 물론 옆 나무에 끼칠 영향력과 계절 따라 그 나무가 변화하는 모습까지도 일일이 그려봐야 한단다.

자연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는 믿음, 자연에서 얻은 그 진리는 많은 깨달음을 얻게 했다.

스스로 칭하기를 고등학교 중퇴자로 건축이나 식물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는 성원장이다.

분재 기법이나 조경 기술을 배운 적도 없다는 그.

그럼에도 세계인이 놀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냈다.

설계도면도 없이 순전히 자신의 머릿속 영혼에서 나온 그림대로, 아니 그보다는 하늘의 이끄심에 따랐을지도.

IMF 한파를 비켜가지 못해 실의와 좌절에 빠지기도 했지만 나무를 통해 위안을 얻었으며 어렵사리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여기 와서 비로소 하늘 바라며 자연 노지에서 살아가는 분재를 보자 그간 부정적이었던 나의 분재관도 바뀌었다.

원래 난 조막만 한 잔에다 찔끔 녹차를 따라 마시는 다도나 철사에 칭칭 감긴 분재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자연 속에서 자유로이 자라는 나무를 왜 작은 분에다 가둬놓고 이리저리 철사 감아 못살게구나 싶어서였다.

분재라면 일본이 유명한 데다 일본 문화의 한 축 같아서 그 점도 마땅찮았다.

하지만 분재는 중국에서 시작돼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퍼져나가며 Bonsai라는 일본명이 세계사전에 등재되었다 뿐이다.

이름은 선점했을지라도 8백 년 역사를 지닌 한국에서만이 생각하는 정원 덕에 세계 유일의 분재(盆栽) 정원 소유국이 됐다.

분재 감상하는 법은 허리를 낮춰 분재와 같은 높이에서 바라봐야 그 나무의 시련과 인내의 세월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단순히 구경하는 곳이 아닌 나무와 분재를 통해 인생과 철학을 배우고 가르치는 교육문화정원으로 만들고 싶다는 그.

정원을 나오다 정문에서 다시 만난 성원장께 모쪼록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이곳을 더욱 발전시켜 가시길 바란다는 말씀을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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