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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6. 2024

안녕! 노매드

카미노 스토리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 초였다. 프랑스 피레네산맥 언저리 니베 강이 흐르는 작은 동네에 닿았다. 생 장 피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는  평화로운 전원마을이었다. 카미노 프란세스의 출발지인 여기서부터 스페인 북서쪽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까지 걷는 여정에 홀로 나섰다.



산티아고 순례를 시작하기 앞서 출발 지점인 생장의 순례자 사무소에 들렀다. 크레덴시알 델 페레그리노 (Credencial del Peregrino)를 발급받기 위해서다. 이는 내가 순례길을 걷는 사람임을 보증해 주는 일종의 증명서로, 발급료 3유로를 내면 동시에 큼직한 가리비 껍데기도 줬다. 사실 나는 애초부터 경건한 순례자란 단어보다 자유로운 여행객을 표방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카미노 길의 거리와 고도가 표시된 도표를 포함, 전 구간에 걸친 알베르게 안내도와 기상변화에 따른 루트 폐쇄 같은 세세한 정보가 든 유용한 자료도 사무실에서 제공받았다. 그러나 눈썹 무게조차 짐스럽던 당시라 전체를 챙기는 대신 유인물 장장마다 사진에 담아뒀다. 하룻밤 쉬게 된 생장에서는 카미노 길을 걷게 된 설렘으로 잠을 설친 채 새벽을 맞았다. 실로 이 길을 꿈꾸듯 그려온 게 몇몇 해인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일찌감치 피레네로 향했다. 뭉텅이로 몰려다니는 안개가 신록의 숲을 쓰다듬으며 만들어낸 신선한 대기 속을 척척 걸어 나갔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생의 여로에서도 왕왕 그렇듯, 피레네에서 저체온증이라는 예기치 않은 암초에 부딪치며  8백 킬로 도보 완주 계획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후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고도가 높은 산악지대를 지나야 할 때는 무리하지 않도록 두 발 대신 아예 버스나 기차를 이용했다. 실제로 한꺼번에 걸어서 완주하는 케이스는 전체 숫자의 반 정도라니 안타까워할 일도 아니었다. 같은 대륙 사람들은 구간을 끊어 해마다 나머지 코스를 걷기도 하고 차편을 택하는 경우도 적잖다고 한다. 기간 내에 필히 독파해 내야 할 시험제도도 아니고 올림픽 출전 마라토너처럼 삶을 빛낼 훈장이 되는 것도 아니다. 도전과 성취라는 자기만족을 위해 무리하게 체력 소진하지 말고 적절히 조율해 가기로 했다.



일단 알베르게에 들어가면 맨 먼저 크레덴시알을 여권과 함께 접수처에 제시하게 된다. 공립은 6유로, 사립은 10유로 정도의 이용료를 낸 다음 스탬프인 세요(Sello)를 받고 등록을 마쳐야만 자리를 배정받을 수 있다. 크레덴시알이 있어야만 알베르게라는 저렴한 순례자 숙소를 사용할 수 있다. 동시에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정식을 즐길 수 있는 데다 박물관 입장료 할인 혜택도 따랐다.

순례자 여권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명서에 스탬프와 날짜가 찍힘으로, 카미노 길을 어느 코스로 얼마만큼 걸었는지 가늠이 된다. 스페인에서 순례길 걷는다는 징표는 크레덴시알과 배낭에 매단 가리비로, 어딜 가나 일종의 특혜 같은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또한 이 크레덴시알로 자신이 걸어온 여정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콤포스텔라의 순례자 사무실에서 순례 증명서를 받을 수 있다. 순례자 여권이라고도 불리는 이 증명서에 스탬프와 날짜가 찍힘으로, 카미노 길을 어느 코스로 얼마만큼 걸었는지 가늠이 된다.



무슨 특출 난 학위증 받기 위함은 아니지만 애들 같은 치기가 발동, 가는 곳마다 빠짐없이 크레덴시알에 세요를 받아 앞뒷면 칸칸이 거의 다 채워질 즈음 목적지에 도달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봤다. 뿌듯함과 동시에 맥이 풀리는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기왕에 받은 크레덴시알 도장이니 여길 떠나기 전  증명원을 받으려 물어물어 순례자 사무실을 찾아갔다.



OMG! 순례 완료를 나타내는 증서를 받자면 기다리는 줄이 무척이나 기다랗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잠깐 회의감이 스쳤다. 꼭 증명서를 받아야 할까. 그러나 천근만근이던 다리는 저절로 줄에 섞여 들게 되었고 동시에 아지 못할 새 기운이 돋아났다. 주변에 있는 카미노객 거의가 상처 진 발을 절뚝이며 스틱에 의지한 채 순서를 기다렸는데 그에 비하면 내 상태는 아주 양호한 편이었다.



콤포스텔라 대성당 사무국은 입구부터 북적댔다. 줄 맨 끝에 서서 기다리기를 거의 두 시간여, 내 뒤편으로 나래비 선 줄이 길게 늘어가면서 점점 앞으로 다가갈 수 있었고 마침내 사무실에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증명서를 손에 들고 자랑스레 기념사진을 찍는가 하면 야호! 팔을 뻗으며 환호하기도 했다. 시민권을 받을 때도 그랬듯 무덤덤한 느낌이었다.


크레덴시알과 여권을 제시하고 증명서를 받아 사진에 담고는 반으로 접어 배낭에 넣었다. 그로써 한 달간의 산티아고 여정을

 마감하고 마드리드로 향하며 또 다른 카미노 길손이 되었다. 파리에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는 충분한 여분의 시간이 있으므로 지도를 보면서 도중에 어디로든 빠질 것이다. 수도 근방 여기저기 볼거리가 많은데 바르셀로나도 마음을 끈다. 그러나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다. 마찬가지로 머무는 기일도 어디까지나 유동적이다.



생각 같아선  은근 빌바오의 명물 구겐하임 미술관도 들리고 싶고 마드리드 인근인 톨레도와 세고비아도 가고 싶지만 욕심이나 억지 부리지 않겠다. 미리 계획을 잡지도 않겠다. 우리네 삶 역시 뜻한 바대로,  설계대로 흘러가던가? 그때그때 발길 가는 대로 형편에 맞춰 구순히 따르기로 한다.  이제부터 진짜 길 위의 자유로운 나그네, 미지의 여로를 걷는 순례자, 명실공히 노매드다.

배낭에 매달려 한 달 여 동행한 카미노 상징 가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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