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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7. 2024

긴긴 기다림, 구엘공원 2

카미노 스토리

오후 늦게야 차례가 되어 자연 광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다행히 노을 진 다음이 아니었기 망정, 마지막 순번일지언정 그나마도 얼마나 감지덕지했던지. 덕분에 부드러이 안겨드는 일몰 풍경에 고즈넉이 잠길 수도 있었다. 지중해 연안의 오월, 고맙게도 스페인의 하루해는 길었다. 아홉 시가 넘었어도 아직 태양의 잔영이 남아 훤했다. 구엘공원의 백미인 나투라(Natura) 광장을 서두름 없이 아래위로 샅샅이 훑으며 돌아다녔다. 아름다운 곡선이 파도 밀려오듯 한 파도 동굴은 화보를 찍는 멋들어진 모델들이 자주 배경으로 사용하는 곳이라 알려졌다.   



동화의 세계나 환상의 공간 같은 구엘공원은 저절로 늘어진 덩굴식물, 늠름한 종려나무, 이국적 정취를 자아내는 야자수며 올리브나무가 주변 조형물들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저마다 자연의 일부가 되게끔 만들어 버리는 구엘공원은 묘하게도 뭐든 주위 환경에 스스럼없이 녹아 혼연일체가 되게 했다. '독창적이란 말은 창조주가 만들어 낸 자연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 가우디. 맞다.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 게 창작인데 정작 구약 전도서에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 하였듯 하늘 아래 새로운 게 무엇이랴. 모든 게 다 자연의 한 면을 본뜬 모방작에 지나지 않거늘.  

가우디 박물관 내 소장품
가우디의 침실
가우디의 기도실
가우디 박물관 외관

                                                                              
가우디 박물관으로 쓰이는 분홍 주택은 가우디가 생전에 20년을 머물던 집으로 조촐하고 검소한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그만 성당이 그 옆에 서있었는데 여섯 시에 뎅뎅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건설 현장에 널린 돌멩이를 시멘트로 뭉쳐 움집 짓듯 쌓아 올려 만든 여러 돌기둥 회랑들. 일종의 인공 동굴은 긴 돌을 늘어뜨려 종유석 효과까지 주었는데 그 안에서 길거리 뮤지션들이 즉석 공연을 펼쳤다. 동굴이라 묘하게 되울려 공명하는 음향이 한층 신비롭게 들렸다.



바르셀로나 시가지와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광장에는 부드러운 금빛 모래가 깔려있었는데 야외 공연 장소라 한다. 먼저 광장의 테라스를 둘러싼 뱀처럼 구불구불한 곡선의 타일 벤치가 단연 눈길을 사로잡았다. 남색 주황 청록 노랑 등 강렬하고 오묘한 색깔이 무척 화려했다. 세라믹 타일로 아름답게 모자이크 된 이 트렌카디스 (Trencadis) 기법은 타일이나 도자기 파편으로 모자이크를 만드는 방식. 트렌카디스는 카탈루냐어로 '깨뜨리다'라는 뜻을 가진 트렌카에서 유래된 단어라 한다. 이때 사용된 타일들은 공장에서 나오는 깨어진 폐 세라믹 조각들, 물자 귀한 1차 대전 시라 이를 적극 활용하였다.



벤치 중간중간 기울기 적당하게 뚫린 작은 홈은 빗물이 의자에 고이지 않고 흘러내리도록 세심히 설계된 것. 이 물길은 층계 아래 도마뱀 분수로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세계에서 가장 긴 벤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더니 곡선을 펴면 정말 굉장한 길이가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벤치에서야말로, 인체공학적으로 디자인된 의자에 등 기대고 앉아 볕을 쬐는 바위 위의 도마뱀처럼 늘어져 오래 머물고 싶었다.  

 

살라 이포스틸라(Sala Hipostila)라는 실내 홀은 자연 광장의 하층부다. 수십 개의 도리아식 육중한 기둥이 신전처럼 받들고 섰는데 그 천정엔 해와 달, 구름을 나타내는 화려한 장식들이 비정형의 타일과 세라믹으로 촘촘히 곡면을 에워쌌다. 그 섬세한 작업에 들인 노고와 공력이 대단하다 싶었다. 애초엔 시장터로 만들어졌다 하나 그 자리에서 음악회가 열리면 스테레오 역할을 훌륭히 한다는 기둥과 천정이다.



계단 아래서 기다리는 헨젤과 그레첸 동화에서 영감 얻은 과자와 사탕집은 달콤한 초콜릿이 살살 녹아내릴 듯 사실적이었다. 과자집 지붕 위엔 세라믹 타일로 표현한 용의 형상이 꿈틀거렸다. 한 건물은 경비실로 만들었으나 현재는 기념품 판매장으로, 오른쪽 건물은 사무실로 사용된다. 그곳으로 내려가는 층계 중앙에 있는 도마뱀 분수는 구엘공원 상징물로 트렌카디스 기법의 최고봉. 인기 있는 포토존으로 졸졸 물을 뱉어내는 도마뱀 배경 삼아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 아래 조형물은 성경 민수기에 나오는 놋 뱀 (Nehustan). 모세가 하느님의 명을 받아 십자가에 세워둔, 구원을 약속했던 놋 뱀이라고 한다.



자연친화적인 구엘공원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유기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 처처에 각기 다른 모양을 한 조형물, 분수, 벽체, 테라스, 기둥, 계단, 담장 등이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철부지가 천연스레 장난치듯 숨겨놓은 보물을 찾아보는 것 같은 묘미를 맛볼 수 있는 곳. 무뚝뚝해 보이는 가우디 양반 어디에 요정나라를 꿈꾸는 이리 천진난만한 동심이 자리하고 있었던 걸까. 꿈길 같은 동화 속 세상을 유영하다 현실로 돌아오니 거리엔 서서히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 닮은 건물이 전송해 주는 골목을 빠져나와 도심의 불빛 점점이 깨어나는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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