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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8. 2024

자운영꽃을 아시는지.

이름도 어여쁜 자운영.

이나 개울가, 둑 등 습습한 야생에서 군락 이루어 자란다.

사월에 꽃 피어나면 마치 연자색 꽃구름 깔린 듯 귀여운 화동들의 군무 아름답다.

꽃 이름이  자줏빛 구름과 같다고 하여 紫雲英, 이 꽃의 꽃말은 '나의 행복'이다.

콩과의 두해살이풀로 꽃은 얼핏 클로버 꽃처럼도 보이나, 종이 전혀 다른 식물이다.

특히 붉은 토끼풀꽃과 자운영꽃은 색깔이나 화형이 비슷하지만 잎새 형태가 영 다르다.

자운영 잎은 아카시아 잎처럼 동글동글 작은 잎이 8~10개 정도 나란히 달려있다.

어린순은 식용하며 풀 전체는 좋은 소먹잇감이다.

꿀을 제공하는 밀원식물로 벌들 불러 모아 봄 내내 벌나비 잔치판 벌인다.

자운영꽃은 사월 논둑길에서 우리 눈을 호사시키면서 농심 자못 흐뭇하게 해준다.

자줏빛 구름이 대지에 내려와 꽃이불 펼쳐둔 듯 고운 모습으로 논을 휘덮어 장관을 이루는 덕분이다.

뿐만 아니라 꽃이불은 농부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살신성인하듯 헌신하는 식물이다.

자운영은 거름으로 쓰이는 친환경 퇴비 식물로 땅기운을 높여주는 녹비식물이라서다.

모내기 전까지 빈 논 가득 자욱하게 자라, 꽃 환히 피운 다음 갈아엎어져 유용한 퇴비가 돼주는 자운영.

뿌리에 붙은 뿌리혹박테리아에 질소 성분이 풍부하기에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므로 천연비료 역할을 한다고.

하지만 화학비료가 등장하며 농촌에서 자운영이 자취를 감춘 지 제법 오래됐지 싶다.  

예닐곱 살 때 외갓집 논에서 본 후론 다신 못 봤으니 거의 칠십 년 전의 추억어린 풍경이다.

그 자운영 꽃을 보려고 하논에 벌써 몇 번째 온 건가.

매화 갓 핀 조춘부터 찾아와 그때 논두렁에 겨우 돋은 아슴한 기억 속의 작은 풀잎과  상봉했더랬다.

하얗게 냉이꽃이 피자 다시 하논으로 내달았다.

넓은 분화구 안 논바닥 샅샅이 훑었으나 자운영꽃 고작 서너 송이 만났을까.

목련도 이미 지고 따사로운 봄볕 제법 화창하기에 화들짝 놀라 하논으로 달려왔다.

통통통 트랙터 소리가 들렸고 이미 여러 논바닥은 갈아엎어져 있었다.

아직 갈지 않은 논 쪽으로 급히 내닫자 논두렁에 안개꽃 같은 하얀 꽃 북했다.

온갖 잡초 무성한 사이사이로 오오, 마침내 논바닥 여기저기 피어있는 자운영꽃과 해후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자운영 꽃만큼 논 가득하게 피지는 않았어도 자운영꽃은 예전 그 자운영꽃 맞았다.

서귀포에 닻을 내린 삼 년 전 초겨울.


서귀포에서 논농사를 짓는 곳이라 모내기철에 와보려던 하논 분화구인데 철새가 날아든다기에 들렀다.

하논은 큰 논(大畓)을 이른다.

분화구 바닥에 내려서자 좁고 너른 수로와 황량한 습지가 이어졌다.

키대로 자란 부들 열매가 꺼벙하게 부풀려져 바람에 씨앗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벼 베고 난 그루터기만 남은 논바닥에 빈틈없이 빼곡 들어찬 풀들.

근자 들어 육지의 다른 지방 논은 잡초제거제를 사용하는지 맹송하니 풀이 전혀 없던데.


그렇다면 특별히 환경보호 차원에서 화학제품 사용을 자제하는 곳이 아닐까.

어릴 적 외가에서 보았던 논두렁이 생각나 쪼그리고 앉아 논바닥을 살펴보았다.

이 논엔 어쩐지 우렁이도 살 거 같고 자운영 꽃도 필 거만 같았다.

아직도 눈에 삼삼한 그 꽃, 이른 봄이면 논배미 한가득 자욱하게 피어나던 연연한 분홍보라 자운영 꽃.

클로버 꽃 비슷하나 그보다 꽃이 크고 빛깔이 아주 고운 .

논배미를 휘덮다시피 깔린 자운영은 모판 만들기 전 논 갈아엎을 때 뒤집혀 거름이 돼주는 갸륵한 풀이다.

퉁퉁퉁 경운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조심조심 논둑길 따라 걸어갔다.

자칫 운동화가 진흙탕에 쑥 빠질 수도 있기에 비좁은 논두렁 살살 디뎌가며 나아갔다.

큰 수로에 놓인 시멘트 다리 건너자 논바닥에서 한 노인이 볏짚을 거두고 있었다.

경운기 뒤 칸 수북하게 볏짚이 쌓여있기에 사료로 쓰시나요, 물으니 퇴비할 거라고 했다.

추수를 낫으로 하셨냐니까 이십 년 전이나 낫질했지 요샌 기계로 수확한다고.

그럼 수확할 때 볏짚도 동시에 다 수거되는 거 아니냐 묻자, 시에서 볏짚을 돈 내고 사용하기 때문에 그냥 놔둔다나.

알고 보니 볏짚에 남은 나락을 쪼아먹으러 오는 철새들을 위해 농가에 세를 고 겨울 동안 볏짚을 쓰는 거였다.

하논 분화구에는 곡식이 자라고 수로가 있어 새들이 모여들만 한 필요 여건이 갖춰졌다.

노인은 늦가을부터 겨우내 철새 사진 찍으러 오는 작가들이 많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혹시 여기 논에 우렁이도 있지 싶은데요, 봄에 논바닥 가득 자운영 꽃도 필 거 같고요, 하자 아~ 그럼! 하신다.

오호~ 정말요? 자운영도 핀다니 이른 봄 여러 차례 하논 분화구 들락거리게 생겼다.  

저쪽 수로에 가보면 커다란 우렁이가 많다며 손가락질하는 방향으로 고맙다는 인사 남기고 곧장 직진했다.

수로 건너 양계장이 있는 곳에서 잠시 물가를 살피자 과연 우렁이가 보였다.

살아있는 우렁이가 아니라 물에 둥둥 떠있는 속이 빈 우렁이 껍데기이긴 하지만.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고 부화된 새끼는 어미의 살을 먹으며 자란다는데.

하논은 방문자 센터에서 언덕을 내려가는 데크 길이 제법 될 만큼 깊숙하게 파인 분화구다.


동서로 1.8km, 남북 간 1.3km의 타원형 분화구로 한라산 백록담보다도 규모가 한결 크다.


다른 오름이 화산 폭발로 봉긋 솟아오른 형태라면 하논은 지표면이 낮게 가라앉은 형태의 오름이다.


위로 올라가는 오름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는 오름도 있다니 꽤나 독특하다.


분화구 속에 들어와 있어도 고개를 들면 한라산이 정면으로 뚜렷이 보여 그 또한 신비로웠다.


약 5만여 년 전 지표면 아래에서 화산 폭발이 이뤄진 뒤 땅속 가스가 빠져나가면서 바닥이 가라앉은 독특한 하논 분화구.  


한반도 최대의 마르(maar) 형 화산으로 즉, 화구의 둘레가 둥근 꼴의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원형의 요지(凹地)다.


생성 초기에는 거대한 호수였으리라 추정되며 오랜 세월에 걸쳐 퇴적층이 쌓이면서 현재의 지형이 되었다.


분화구 내에 용천수가 솟는 곳도 있으며 비가 오면 물이 넉넉히 고여 제주에서 특이하게도 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다.


그리하여 하논 마을에는 현재 백여 명의 주민들이 농사와 축산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과거 5백 년 전부터 여기서 벼농사를 지으면서 대대로 사람들이 살았다는 역사 기록도 존재한다고.


한편 서귀포 지역 천주교 선교를 담당한 하논성당은 토착민 정서에 반하는 선교활동으로 '이재수의 난'을 불러온 빌미가 되기도.


4.3 당시 소개령으로 마을이 사라진 적도 있으며 그때 무장대와의 연루 혐의로 사찰이 전소되는 법난을 겪었는데 다시 복원됐다.


한때 분화구에 야구장 건설 계획을 세웠다가 환경단체의 반대로 철회한 적도 있다고 한다.


지금은 올레길 7-1코스로 조성돼 올레 리본 깃이 곳곳에서 나부꼈다.


하논을 학계에서는 ‘생태계 타임캡슐’이라 하는데 5만 년 동안의 기후, 지질, 식생 등 환경정보가 고스란히 보관돼 있어서라고.


또한 미래 기후를 예측하는 연구의 최적 장소로 학술적 가치가 높아, 하논 분화구는 계속 존속될 터.


따라서 해마다 봄이 오면 자운영꽃을 여기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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