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y 29. 2024

바위의 뼈

고려를 거쳐 조선조 그리고 이천 년대의 현재에 이어진 목조건물 앞에서 잠시 아득해진 적이 있었다. 무량수전에서 허옇게 드러난 나무의 뼈와 마주했을 때의 일이다. 갈비뼈 도드라지도록 여윈 가슴처럼 결결이 목리(木理) 드러나 보이던 문지방은 우묵 패인 채였다. 연한 목질의 속살은 풍우에 씻겨 흔적 미미해지고 목리만 도드라져 보이던 그 닳고 닳은 문지방.




이기대(二妓臺) 바닷가에서 바위의 뼈를 만났다. 그건 뼈였다. 파도의 끊임없는 침식작용에 의해 죄다 발라내진 살. 그래서 옹이 마디진 뼈만 남은 바위. 백악기 화산암류 지질대라 했다. 거침없이 낮은 데로 치달리던 용암이 바다를 만나 주춤 몸 사렸다가 들끓는 제 신열에 겨워서 용틀임을 한 자리. 오연한 대(臺)를 남기고 비밀스러운 굴(穴)을 만들고 서리서리 협곡을 이루고 높다라니 첨탑을 세운 다음, 강한 것 중의 강한 것만 남겼다. 억센 것 중의 억센 것만 남겼다. 힘 중의 힘, 옹골차게 응축된 에너지의 정수 같은 갯바위였다. 광맥 사이에 박힌 원석이듯 모습 명료히 드러낸 바위의 뼈는 어쩐지 자코메티의 조각을 연상케 했다.




그날의 이기대는 전혀 예정에 없던 걸음이었다. 일곱 해 넘도록 내처 잠만 잔 내 운전면허증에게도 때가 되니 갱신 통보가 왔다. 마침 박물관에 약속이 있던 차라 방향이 같은 면허시험장에 들릴 요량으로 준비물을 갖춰 가지고 왔다. 새 면허증을 교부받으려면 한 시간쯤 기다려야 한다기에 신문을 살까 두리번거리다 문득 이기대를 떠올렸다. 여기서 두 정거장 남짓한 가까운 이웃에 위치한 이기대. 어정쩡한 공간으로 빈 틈새를 이용해서 잠시 다녀오기로 했다.



앞자락 질펀히 바다를 두른 부산에는 지형적 특성상 절경 이룬 해안 명소가 많다. 널리 알려진 태종대 몰운대의 빼어난 경관에 버금 할 만한 천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기대. 근자 들어 해안가 암반에 찍힌 공룡 발자국의 확인으로 매스컴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기대다. 한때 군 작전지로 출입이 통제된 터라 오히려 자연 그대로의 풍치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암석해안이다.




봉긋한 등성이를 넘어 산모롱이 하나를 돌자 아청빛 바다가 품 가득 안겨 왔다. 왼 짬으로는 해운대가 마주 보인다. 장산(長山)이 흘러내린 그 아래 빌딩 무리 지어 숲을 이루고 따개비 붙듯 건물에 뒤덮인 달맞이 고개는 예전의 운치를 찾을 길 없다. 시선을 얼른 먼 대양 쪽으로 옮긴다. 조망권이 넓어 새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곳. 고지식한 이념처럼 무뚝뚝하게 그어 놓은 일직선이 아닌  수평선이 너그러워 보인다.



창망(蒼茫)히 펼쳐진 바다. 해풍은 꽤나 거세다. 내 몸무게마저 휘둘릴 만큼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사막에 회오리 모래바람 일듯, 눈사태 나 눈바람 휘날리듯, 해상 곳곳에서 소용돌이 일구는 파도 자락 따라 하얗게 가루져 흩날리는 물보라. 들끓는 바다는 관능의 신음소리로 무너졌다가 되일어나기를 거듭한다. 그리곤 겹겹의 물이랑 앞세운 채 아우성치며 내닫는 파도.



파도 소리는 바다가 숨 쉬는 소리 같다. 심장의 강한 펌프질 소리 같다. 그처럼 격렬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가 돌연 용솟음친다. 억제시킨 욕망들 고삐 풀고 빗장 열어 마음껏 방류시켜 볼 수 있다면, 외적 제동에 의해 눌러야 했던 욕구들 마구 분출시켜 볼 수 있다면. 인습의 굴레며 인연의 사슬 죄다 벗어버리고 자유로울 수 있다면 저 파도 위로 나를 날려 버려도 좋겠다. 죽음조차 아름다울 것 같은 충동이 황홀하다.



파도에 취해 헛것이 보이는가. 노트르담 주교 프롤로의 에스메랄다를 향한 저주스런 사랑, 그 절망과 파멸이 떠오른다. 순간을 영원으로 태워 버리는 미친듯한 사랑에 빠진 서라벌의 지귀(志鬼)가 어른댄다. 암벽에 생가슴 내던지며 흰 피 뿌리는 순교자의 넋이 뜬다. 아니, 피리를 불며 바다로 유혹하는 사악한 주술사의 환영을 본다.



강한 자력으로 끌어당기는 흡인력이 바다에게는 있는 듯 벼랑 가까이 다가서다 멈칫, 발끝이 긴장한다. 발바닥에서 뜨겁게 올라오는 기운, 여전히 지심 저 깊은 곳에서는 이글거리며 불길이 타고 있으리라. 그러다가 치받쳐 오르는 불덩이 주체 못 해 한 번씩 뒤척대는 땅. 지진이 나고, 화산이 솟고, 그렇게 지구가 호흡해 온 분명한 증거의 잔해가 여기에도 있음이니. 그 위로 무수한 일월이 스쳐 가는 동안, 바위는 파도와의 완강한 대치에 마모될 대로 마모돼 지금은 뼛속의 뼈만 남았다. 자코메티의 조각 같은 앙상한 뼈 무더기 아래서 끊임없이 해체되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파도가 내게 손사래질을 보낸다. 이제 어여 너의 현실로 돌아가라는 듯이.



운전면허증 안의 사진, 날 선 콧날의 여자가 묻고 있다. 세월의 파도에 깎인 너는 어떤 모습의 뼈로 남을 것인가, 하고.

작가의 이전글 대빵 큰 공룡화석 에피소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