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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31. 2024

바윗돌과 부평초

딸내미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왔다.

소셜 오피스에서 내 의료보험료가 연체됐다며 2천5백여 불을 지불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

[메디케어 밸런스 $2512.70 고지,

이 내용을 토대로 소셜국에 전화해야 해. 갑자기 메디케어에서 연락이 왔어. 오늘 아빠가 소셜 오피스 가봤는데 엄마 해외에 있다 해도 본인이 직접 전화하라고 함.

1-866-xxx.... 한국시간으로 새벽 2시부터 아침 9시까지 오픈하니까, 전화해서 왜 내야 하는지 물어보삼. 그리고 해외 나가 있는데, 그동안 메디케어 스탑 할 수 는지도 물어보고 즉각 스탑 시켜두삼.]

엥? 느닷없이 이게 무슨 소리야?

안달복달해 대는 성마른 승질머리라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두드러기 돋을 판.

한밤중에 일어나 소셜 오피스로 전화를 걸었다.

삼세번이 아니라 다섯 번이나 통화시도를 했으나 담당자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홀던! 말대로 그렇게 일단 기다리다 보면 한정이 없는 거다.

결국 국제전화료만 꽤나 나오게 생겼다.

매사 빨리빨리에 익숙한 한국인이다.

한편 미국 모든 기관의 사무 처리 속도는 중국식 만만디 저리 가라다.

직원들은 하나같이 여유만만, 제 볼일 다 보면서 천하태평으로 세상 느긋하게 일한다.

소방서나 응급 시스템인 911 외엔 도대체 급한 게 하나도 없어 보인다.

실제 소셜국이나 DMV( Department of Motor Vehicle)나 은행도 한없이 느려터지긴 마찬가지다.

느릿한 시스템 자체에 익숙한  미국인들에게 이는 하나도 답답하게 여길 사안이 아니다.

그러려니 하고 기다릴 뿐이다.

다들 인내심 끝판왕 같다.

소셜오피스와의 통화를 포기하고 요셉과 카톡을 했다.

전화료만 왕창 나오게 생겼다며 여러 번 소셜국에 통화 시도했던 얘기를 늘어놨다.

요셉 왈, 카톡은 안 되나?

사무실 일반전화는 유선이고, 카톡은 무선전화인 휴대폰만 가능하다는 걸 모르는 1인이다.

그제서야 가만! 그렇다면 사무실 다시 가서 자기 핸드폰으로 연결해 보겠노라 한다.

집에 내 신분증인 아이디카드(운전면허증) 놔두고 오길 잘했지 뭔가.

요셉이 여기 시각으로 아침나절 연락이 와, 처리 잘 될 거라고 했다.

즉, 담당 직원과 내가 요셉 핸드폰으로 통화하도록 주선했던 것.

전화를 바꿔줘 통화를 나눌 때 담당자는 서류에 내 사인이 필요하니 그걸 해주면 된다고 했다.

페이퍼가 사진으로 왔으니 그쯤이야 알아서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딸내미에게 경과보고를 했다.

아, 그런 방법이... 역시 연륜은 무시 못 하지, 하길래 냉큼 요걸 보냈다.


일을 매듭지은 후, 얼마 전에  딸내미와 길게 통화 나눈 적이 있다.

난 참 고약한 사람이고 이기적인 엄마 맞긴 맞나 봐.

아빠한테 서귀포 와서 좋아하는 낚시하며 지내라고 했더니 이러더라.

딸내미만 혼자 미국 놔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럼 난 냉정하고 야멸찬 엄마가 맞네?


하긴 태생이 살가운 성정은 아니지.


타고난 성격이야 어쨌거나 그 이전부터 줄기차게 아들은, 연세도 있으신데 부모님 이젠 한국 와서 사시라며 누차 권했다.

그럼에도 우린 리턴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2019년 가을, 나 혼자 한국 방문차 왔다가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대화 중에 아들이 지나가는 말처럼 이랬다.

두 분 계속 미국에서 지내시다 무슨 일 겪으면, 한번도 자식 노릇할 기회가 없었던 자신이라 회한 많이 남을 거라고.

에둘러 말하지만 나이 든 우리에게 생길 '무슨 일'이란 아프거나 이승 떠날 일뿐.

그 순간 갑자기 결심이 섰다.

우선 나부터 국적회복 절차를 밟았고 하얗게 눈 쌓인 그해 겨울에 복수국적자가 되었다.

그러다 서귀포 찬가를 부르며 서귀포에 살게도 되었고.




인생 후반부에 가로 늦게 자유 구가하며 여기서 화양연화의 행복스런 한때를 누리면서 즐거이 지내고 있는 나.

그러나 꽃놀이에 취해 살면서도 가끔씩 양심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다 장성해서 각자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녀들은 문제 될 게 없으나, 나이테 늘어가는 요셉을 생각하면 미안한 감이 들기도 했던 게 사실.


결혼한 지 오십 년이 넘은 우리 부부는 현재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각자 미국과 한국에서
산다.


이혼을 한 사이도 아니며 그 전단계인 별거에 들어간 건 아니지만 모양새야 별도로 사니 영락없는 별거.


요새 졸혼이란 말을 흔히 쓰던데 우리 역시  혼인관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서로 간섭하지 않고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편벽되이 보수적인 경상도 남자와 사는 동안, 그런 생각이야 굴뚝같았으나 입 밖으로 표현하진 못했던 거사를 자녀들 조력으로 마침내 이루어냈다.


오십 넘으면 자식도 어렵고 조심스러운 존재다.


남편은 알았다고 한마디만 했다.


마침 당시 한국에 나와있었기에 나의 독립생활은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것을.


혹시?


아직은 우리 둘 다 성인병 없이 건강한 편이다.


그러나 만일의 경우란 누구도 예단키 어려운 바, 이 상태에서 덜커덕 이승을 등지는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두고두고 죄책감에 시달릴 터.

그래서 여긴 날씨도 좋고 낚시며 골프 같은 취미생활도 할만한 지역이므로 오라 했으나 끄덕도 안 했다.


요셉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너댓번이나 거푸 읽으며 성서에 맛들인 줄은 진작부터 안다.


근자엔 YMCA 다니며 수영도 즐기고 인근 한인마켓에서 장 다 식성대로 요리 만들어 먹으면서 즐거이 지내니 피차 신경쓰지 말잖다.


생선을 무척 좋아하는 요셉에 반해 비린내라면 질색인 나인지라 순간적으로 찔끔 찔리긴 했다.


요셉은 미국에서 사는 게 만고 속 편하고 정신건강에도 좋다고 거듭 말한다.


괜히 정나미 떨어지는 정치권 보며 혈압 올리기도 싫고 위아래 개념이 실종된 사회상도 못마땅한 상꼰대의 전형인 요셉이다.


누차 권해봐도 싫다니, 딸에게 아빠를 한번 설득해 보라 했다.

아들과 달리 딸내미는 여러모로 아빠를 많이 닮은 데다 서로 케미도 맞는 축에 속한다.

그 딸이 한마디로 명쾌하게 우릴 정의한다.

오십 년 넘게 부부로 살았으면서 엄마는 아빠를 그리 모리나?

성정이 아빠는 바윗장이고 엄마는 부평초 같다는 걸.

아빠는 태생적으로 앉은자리에서 움직이는 걸 잘 못하는데, 엄마는 세상 온데 쏘다니길 좋아하지 않느냐고.

미국 이민도, 동부에서 서부로 이사할 결단도 엄마가 앞장선 거잖아.

구구절절 맞네, 토 달 거 하나 없이 여기에도 100% agreed!


요셉은 한번 자리 잡으면 꿈쩍하려 들지 않는 바윗장이다.

한편 부평초처럼 한자리에 진득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잘도 떠도는 나.

역마살을 타고났는지 나는 노매드 기질 다분하다.

좋게 표현해서 자유로운 영혼인데, 그 점이 가정생활을 옳게 유지하기에는 걸림돌이더라는.

쓰다 보니 제주살이 하는 독거노인, 일종의 고해성사 만방에 대놓고 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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