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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2. 2024

달빛향기

수없이 뒤채이는 바다 비늘의 술렁임. 칠흑 바다에 홀연 은사 자락 드리우더니 천천히 보름달은 떠올랐다. 짐짓 수줍은 듯 다소곳하게 그러나 아주 의젓하고 당당하게. 달 떠오르니 여태껏 어둠에 모습 묻었던 초목들 넌지시 눈 뜨고, 제 이름 불러주길 기다렸다. 달빛 아래 그들 실루엣은 한 겹 운무에 싸인 양 어렴풋 은은했다.

 

섬세히 부드러운 옷깃 나부끼며 바람이 달빛을 흔들었다. 하여도 변함없이 기품 오연한 보름달은 역시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위엄 갖추고 무상심(無常心) 했다. 창천에 홀로 큰 빛 일구며 깨어있으나 결코 유아독존으로 오만 부리지 않는 달. 오히려 겸양의 은근스러운 빛으로 천지 비추며 유유자적 거닐 따름이었다. 보름달의 덕성 통해, 가득 찬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라는 유현(幽玄)한 뜻마저 다소 짐작 가는 밤이었다.

 

평온의 미소, 온유의 손길 내미는 달은 어쩌면 천상의 관음(觀音) 이리. 억조 중생 보살피는 너그러운 자애의 눈길이 그러하고 은은한 빛의 여운 역시 그러하다. 이리 아늑한 편안함을 관세음 아니면 뉘라서 베풀 수 있으랴. 구름 한 점 띄우지 않은 청야(淸夜). 밤이 이토록 맑고 푸르러 슬픔일 만치 고울 수 있다니. 게다가 창파에 또 하나 명월 뜨고 청산엔 삽상히 스치는 청풍. 더 이상 갖춰질 게 있을까 싶잖은 여기가 바로 피안이리. 정결무구한 지금 이 순간, 나 유여열반(有餘涅槃)을 누림이리라.



저 아래 세간의 소란마저 이 밤, 그저 어여삐 여겨진다. 꽃밭같이 화려한 해운대 시가지 명멸하는 불빛과 바다에 점점 찍어놓은 고깃배 집어등 바라보며, 꿈꾸듯 서있는 이곳은 달맞이고개. 그동안은 우리 집 건너편 봉긋한 동산에 떠오르는 달을 맞는 것만으로도 은총이라 여겼었다. 그러다 소나무 다보록하던 동산이 고층 아파트 단지로 바뀌며 그 정복(淨福)을 잃고 말았다. 이후, 곧추선 아파트 숲의 각(角) 진 윤곽 너머 솟은 달을 얼마쯤 황량한 기분으로 마중해야 했다. 사각과 원은 어찌 그리도 화해할 줄 모르는 불협화음인지.



차츰 나는 달에서 멀어져 갔다. 하긴 잡다한 일상에 밀려 휘영청 창가 밝힌 보름달도 놓치기 일쑤였다. 내 생활이란 게 딱히 바쁠 것도 없으면서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든 채 붕 떠서 살고 있었으니까. 괜히 분망 떨며 지내느라 하늘마저 올려 볼 여유 없었던 정서적 빈곤 상태였으니까. 어쩌다 작정하고 달을 쳐다볼라치면 달은 그새 창백한 얼굴로 중천에 높다라니 떠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한 번은 꼭,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달을 바라볼 거라며 벼르던 참이었다. 내심 달맞이 고개에서의 달마중을 하고야 말리라던 꿈 얼마 후 이루어졌다



굳이 거길 찾지 않아도 어디에서나 달은 볼 수 있다. 허나 달맞이 고개에서 맞는 달맞이의 정취, 그 호사 얼마나 누려보고 싶었던가. 해운대에서 송정 이르는 길목인 와우산에 이름조차 운치로운 달맞이 고개가 있음을 안 뒤부터 안달이 났었다. 어느 해 여름, 달맞이 고갯길 지나다 바다와 산이 빚어내는 가경(佳景) 앞에 그만 숨 멎을뻔했다. 풍광 수려한 대한 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날렵하니 자유로이 떠다니는 갈매기 뒤로하고 굽이진 산길 돌고 돌면 그윽이 내려다보이는 청사포 해변. 나지막 가라앉은 어촌 모습은 유년의 고향 풍경이듯 정겨웠다. 선명한 대비로 눈부신 청록 바다에 뜬 미역 양식장의 하얀 부표며 아물거리는 바다 끝에 한 무더기 햇솜으로 깔린 구름밭까지‥‥



차도 곁을 바짝 따르는 숲. 송림과 오리나무 아카시아 밀밀하게 우거진 데다 해조음도 한데 어울려 이뤄진 숲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산모롱이 벼랑길 돌다 보면 송정 해수욕장 완만한 해안선이 긋는 포물선도 나타났다. 숲과 바다 동시에 거느리고 그 길 지나노라면, 비록 잠시일지언정 온갖 세상사 한낱 티끌로 날려져 마음 정갈하게 맑혀지곤 했다. 이리도 미쁜 그 길. 정월 대보름날 밤이면 달맞이하려는 인파로 북적거린다는 곳. 하지만 혼잡 속에서 달을 맞고 싶진 않았다. 해서 칠월 백중 보름달이거나 중추절 보름달 가려 달맞이 길 오르리라 별렀다.

 

달맞이 고개에서 기다리는 달. 사뭇 외경심마저 느끼며 동해와 마주 섰다. 구름이란 구름 죄다 하늘 맑게 비워두고 수평선 어름에 포복해 있었던가. 바다 한 녘이 희뿜하게 밝아오는가 싶더니 구름 위로 달 소소(昭昭)히 솟아올랐지. 장엄하고도 신묘한 빛의 조화 속에 바다가 갑작스레 표정을 바꾸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였다. 바다에 길게 난 달빛 길, 은비늘 반짝대는 윤슬 길은 죽음마저 황홀할 것 같은 감미로운 유혹 같았다. 환각이듯 어찔거리는 도취감에 전율하면서도 바다를 아니 내려다볼 수 없었다. 한오백년 가락마냥 처연한가 하면 꿈결인 양 아련히 출렁거리는 달빛 바다.



겹겹의 은파. 사근대듯 밀려와 잔잔히 부서지는 바다의 미묘한 속삭임이 문득 겁도 났다. 요기로운 바다의 손짓이 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신탁의 주문에 빨려 들듯, 강한 자력으로 이끄는 은밀한 부름에 오싹 한기가 돋았다. 아, 그래서 예전부터 이곳에서 낙하하듯 투신하는 꽃잎들 그리도 흔했나 보다. 슬그머니 뒷걸음질 쳐 소나무 굵은 둥치에 몸을 기댔다. 아예 거기 붙박이기라도 한 듯이 한참 동안을. 나무에 기댄 채로 하늘 우러렀다. 깊이 모를 도도함과 고고함으로 달은 저 먼 하늘가에 다만 혼자였다. 그러면서 분수처럼 쏟아내는 달빛, 흥건한 달빛.



푸르다기엔 희고 희다기엔 차라리 시퍼러이 날 선 은장도의 시린 빛. 그러나 은근스럽기로는 깨끼저고리에 아른아른 얼비치는 어깨선이리. 아니면 등촉마저 잠든 깊은 겨울, 창가에 하얗게 반사된 눈빛 이러하던가. 보름달빛 밀밀한 밤하늘. 정화수에 고인 달을 마시듯 전신으로 달을 영접해들였다. 그렇게 혼곤히 달빛 향기에 취해 들었다. 꽃으로 치면 자욱한 바다 안갯속에 풀려나는 해벽의 석난향일까. 연당에 아스름 감도는 연꽃 내음일까. 향마저 진주빛인 치자꽃, 그보다는 인불로 피어오르는 달맞이꽃의 서러움 같기도 한 달빛 향기.



빛의 세례로 온누리는 지고지선의 경계에 든 듯하였다. 파르스름 서늘한 비애로, 하이야니 정결한 서원으로 쏟아져내리는 달빛.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봉헌 올리는 은빛 의식이었다. 세세히 결 고운 달빛은 그늘에서도 티 없이 투명했고 남루한 도시의 외곽에서도 여전히 청청했다. 더하여 빛줄기 하나하나가 경건한 성소(聖所)로 느껴지기조차 하는 달밤이었다. 작은 등불 밝혀든 테레사 수녀처럼 그렇게 낮은 키로 내리는 달빛. 달빛에 오롯이 감싸 안긴 밤, 모성의 가슴이듯 무한한 안식감에 젖어들며 나른함에 빠져들어갔다.



어느새 달은 하늘 한가운데 올라 사해를 지그시 굽어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군림하려는 기미 전혀 없이 여전히 겸손하고 온유한 달의 덕성(德性). 그 유려한 향기를 감히 부질없는 말의 성찬으로 기리는 나. 그 까닭일까. 긴 그림자 더불어 산길 오르는 수행승의 뒷모습처럼 달은 의연하면서도 좀은 고적해 보였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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