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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4. 2024

종낭꽃 향기

어느새 종낭꽃이 시나브로 휘날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연일 비 내려 숲길 걷지 못한 사이, 신록 숲 투명한 새소리에 화음 넣던 하얀 종소리 저 혼자 스러져가고 있었다.

귀엽고도 맑은 얼굴임에도 꽃말대로 겸손히 고개 숙인 순백의 꽃 종낭꽃.  

해마다 종낭꽃 새하얗게 조로롬 피어나 향기 흩날릴 즈음이면, 일부러 때죽나무 아래 오래 서있곤 했는데.

바야흐로 종낭꽃 낙화되는 계절, 자연의 섭리는 우릴 맥 놓고 기다려줄 만큼 한가롭지 않다.

시간은 강물처럼 무심히 우리 곁을 흘러서 지나가느니.

 

종낭은 때죽나무의 제주도식 이름이다.

미국식 이름은 스노우벨이다.

종을 닮은 꽃이 피는 낭구라 해서 종낭, 마치 순백의 눈이라도 덮어쓴 나무처럼 수천 개 흰 종 조롱조롱 매 스노우벨.

실상과 이름이 아주 흡사하다.

누구라도 이 꽃을 찬찬히 들여다봤다면 금방 수긍가는 이름이리라.

긴 꽃대에 종 모양 꽃이 줄지어 하얗게 피어나 신록 숲에 향기 풀어내는 이 나무.

근데 육지에선 하필 때죽나무라 부를까.

풋열매를 갈아서 계곡에 풀면 물고기들이 잠시 기절하여 떼거리로 뜰 때 고기를 잡는 방식에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하긴 화승총을 쓰던 예전엔 열매를 짓이겨 화약에 넣었다고도 하니 주성분인 '에고사포닌'이 독성 제법 강한가 보다.

냇가에서 천렵 즐기는 시대도, 화승총에 의지하던 시절도 지났는데 여전 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몰아가는 이름이라니.

내가 때죽나무라면 개명시켜 달라고 떼쓰겠지만 종낭은 그저 신록 깊어질 무렵 흰 꽃 향기로이 피고 질 따름이다.

앞으론 나라도 이 나무를 종낭이라 부르기로 하였다.


 


간만에 청명한 날씨라 한라산 생태숲으로 해서 절물휴양림까지 걸었다.


요새 곶자왈이고 휴양림이고 푸르른 숲길 어디나 종낭꽃이 한창이라서다.


유독 제주에는 종낭이 흔하다.

한라산 품섶마다 지천인 종낭, 그래서 제주 종낭꿀이 유명세를 타는구나 고개 절로 주억거려졌다.

한동안 숲에 그윽한 향훈 자욱했으련만 연일 내리던 비.

너에게로 오는 길은 그렇게 막혔더란다.

혹여 서운했을까, 혼잣소리 흘렸다.

하늘 푸르게 갠 오늘에사 널 보러 이리 달려왔단다.

시답잖은 너스레 떨며 걷는 숲길, 무성한 나뭇잎 새새로 햇살 어룽져 빛 무늬 아롱아데크에 그려놨다.

산속 어디나 길섶마다 온데 종낭꽃은 하얗게 피어 있었다.

길가만이 아니라 풀숲이나 바윗전에는 종낭 꽃잎 흥건히 떨어져 있기도 했다.

데크 양쪽 가를 따라 누워있는 꽃송이, 백설 내린 길가처럼 숫제 희끗하다.

발치 흙바닥에 떨어진 다섯 장 꽃잎의 은빛 꽃은 그 자체가 땅에 내린 은별 같았고.  

나름의 결실 열매로 남기고 사명 다 하면 무엇이나 저처럼 고요히 흙으로 돌아가리니.

엊그제 빗속이라도 찾았더라면 송이째 떨어지며 흩날리는 꽃 세례 받았으련만...




종낭꽃.

그 꽃엔 엄마 모습 어려있고 엄마 음성 스며있어 종낭꽃이 필 즈음 꼭 산을 찾게 된다.

부산 수영강가 배산 근처 아파트에 살 적이다.

어느 해 이맘때였다.


엄마가 딸네 집에 오셨던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아침마다 손녀를 앞세우고 배산 자락 숲으로 올라갔다.

겸상하기 왠지 편편찮은 사위라 출근할 때까지 일부러 자릴 뜨려는 엄마의 심곡이 헤아려졌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위에다 말수 적은 엄마라 살가운 분위기는커녕 멀뚱불편감은 도무지 좁혀지지 않았다.


엄마는 숲에 들어 산자락에 핀 야생화며 나무에 관해 세세하게 손녀에게 알려주는 자상한 할머니였다.

하루는 산모기에 물려 벌게진 종아리를 보여주며 딸아이가 약 발라달라고 집으로 쫓아왔다.

당시만 해도 초등학교에 오전반 오후반이 있던 시절이었다.

약을 바른 후 딸내미는 고기 잡는 꽃도 피어 있다며 내 손을 이끌고 부리나케 산으로 달렸다.

할머니 젊어서는, 때죽나무 열매 불려둔 물에 흰옷 담가뒀다 빨면 묵은 때가 잘 빠졌더라는 얘기도 신기했단다.

신록이 녹음으로 익어가는 숲에선 아뜩할 정도로 향기로운 내음이 번져났다.

때죽나무에 핀 꽃 향은 그러나 연연하고도 아련한 슬픔 같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왜 딸네 집은 아들네 집만큼 편할 수 없는 걸까.


여전히 사위는 어려운 백년손님인 걸까.


지금 세상 같으면야 흠결도 아니건만 당시 아들을 두지 못한 엄마는 잔뜩 옹송그리고 지내왔다.


한량인 아버지는 평생 첩실을 번갈아 끼고 살았다.


하늘을 봐야 별도 딸수 있으련만 정실이 죄인되어 지낸 그 얄궂고도 모진 세월.

하얀 꽃 촘촘 피어난 그 나무 아래 서있던 엄마는 모기를 쫓으려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뭍이나 섬이나 종낭꽃 필 무렵이면 모기가 성하기 시작한다.


절물휴양림에서 종소리라도 들려줄 듯 조랑조랑 핀 하얀 꽃을 보는 순간 오래전 일이 퍼뜩 떠올랐다.


소금물이 튄 듯 눈이 쓰리며 가슴이 아려왔다.


하염없이 나절을 종낭꽃 향기로운 꽃길 즈려밟으며 신록숲 배회하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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