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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1. 2024

파란 눈의 '민수' 부모님

미사 후 친교 시간.


일 주간 쌓아둔 환담을 나누며 친교실로 내려가니 먹음직스럽게 벌건 육개장이 기다린다.


 추적대는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얼큰하니 따끈한 육개장이야말로 적격이다.


그런데 어쩌나. 한국 음식에 아주 생소한 분들이 섞여 있다.


근자 들어 매주 한인 미사에 참석하는 백인 부부, 게다가 그들의 부모님이신 듯 점잖은 은발의 노부부가 식탁에 함께 자리했다.


그들에게 육개장은 너무도 매울 것이다.


 


지난여름 주보 교우 동정난에 새로 나온 가정 이름이 올랐는데 분명 미국인 이름이었다.


그중 데이비드라는 이름 옆 괄호 안에는 한글로 민수라 적혀있었다.


이후 주일마다 변호사 부부라는 그들을 만났고 그때마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곤 했다.


그러면서도 존경스러운 기분으로 인사 나누게 되는 그들이었다.


아빠 품에 안긴 민수는 돌이 안된 아기로 순수 한국인.


그들은 민수의 입양 부모였다.


  


아기에게 한국적인 체취를 조금이라도 가까이하게 해주고 싶어 일부러 한인공동체를 찾았다는 그들.


서먹하고 불편한 데다 한국어로 진행되는 미사이니 알아들을 리도 없으련만 부부는 열심을 낸다.


한국인과 동화되어 더불어 공감대를 나눌 수 있는 단계까지는 욕심일지라도


한국인의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는 사람 좋아 보이는 밀러 씨.


줄창 아기에게로 향하는 미소 가득한 눈길에서 진심어린 자애지정이 묻어난다.


하늘과 땅을 웃게 하고 싶거든 고아를 웃게 하라는 탈무드의 말씀이 순간 떠오른다.



동족상잔의 비극 탓에 50년대 한국 거리에는 전쟁고아가 넘쳐났다.


포성이 터질 때마다 부모형제를 잃어버리고 외톨이로 남게 되는 고아가 부지기수로 늘어나며 깡통 들고 헤매는 아이들이 즐비했다.


전쟁은 오순도순 평화롭던 가정을 수없이 산산조각 냈다.


혼란의 와중인 전시라서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고아들을 거둘 형편이 못 되자 그때 나선 것이 국제 자선구호 단체들.


 


유엔 산하 기구인 유니세프를 비롯 홀트아동복지회 등이 앞장을 섰다.


지금은 컴패션 월드비전 등 여러 구호단체들이 활동 중인데 우리도 작으나마 한 아이와 결연을 맺은 지 어언 몇 해째다.


이제는 우리의 위치도 수혜자에서 후원자가 된 것.


이렇듯 자선문화가 점차 정착되어가고 있는 한국이지만 자선 순위 국가별 평가를 보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싶다.



홀트아동복지회는 1955년 미국인 홀트 부부가 기독교적 인간애를 바탕으로 설립한 사회복지기관이다.


전쟁고아 그중에도 혼혈아 여덟 명을 미국 가정에 입양시키며 입양전문기관으로의 첫출발을 다.

모든 어린이는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면서 부모와 함께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양보모를 찾아주어 바른 사회 구성원으로 바르게 자라도록 배려해 준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비행기를 타고 낯설디 낯선 이역으로 떠났다.

그들 중에는 신호범 워싱턴 주 상원 의원처럼 성공한 사례도 있는 반면,


정체성 혼란과 인종 갈등의 벽 등 현실적 문제에 부딪혀 좌절해 버린 경우도 다.

그간 홀트회는 70년대 초부터 미혼 부모 상담을 실시하면서 아동일시보호소를 운영하였고 입양인들의 모국방문도 주선하였다.


반면 홀트재단은 점차 원래 취지가 변질돼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시키며 국내외의 큰 이슈로 떠오르기도.

홀트회 탓을 하기 이전, 국민을 지킬 의무가 있는 국가가 수수방관한 사이 벌어진 입양인 관련 사건 사고들은 한국정부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전쟁통이라면 어쩔 수 없다 쳐도 국민소득 2만 불 시대를 맞은 근자에도 한국은 미국이나 유럽 등으로 계속 입양아를 내보내며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이 낯 뜨거울 도 한데 이처럼 여전히 아이들을 해외입양시키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혈통주의가 강한 한국인이다 보니 근본 모르는 아이를 선뜻 맡으려 들지 않는 까닭에 입양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데.

 

게다가 50년대와는 상황이 다른만치 요즘은 도덕적 해이가 불러온 사회문제, 즉 자식을 책임질 능력이 없는 미혼모 출산이 고아를 양산시킨다고 한다.

또는 이혼으로 갈라서며 양쪽 다 자식을 짐 스러이 여겨 부양을 거부하거나 경제 파탄으로 가족이 해체되며 아이마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는 것.

만부득이한 경우라도 인간이라면 응당 제 자식에 대한 책임은 그 부모가 져야 마땅한 일.

자신을 먹이로 내주는 거미 어미에, 설산 고행자같이 얼음 위에서 눈보라 견뎌가며 알을 품는 펭귄의 숭고한 부성애 앞에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어서야 될 말인가.

 

히브리어로 자선과 정의는 똑같은 말이라고 한다.

베풂과 올바름, 둘 다 인간의 당연한 행위로 받아들여질 때 가능한 정의다.

기독교 복음의 골자는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웃이란 나 아닌 타인 모두를 이르는 것.


자기애는 본능이지만 타인에게 베푸는 이타행은 의식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가능하다.

종교마다 줄기차게 사랑을 가르치고 자비를 설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여전히 부족하여 필요하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진부한 단어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가슴 아릿해지고 알싸해지는 아름다운 단어가 사랑이다.

 

밀러 씨 부부는  민수에게 우애를 쌓아나갈 동생이 필요하다 여겨 다시 입양을 작정, 한국 아기와의 연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입양까지의 대기 기간이 너무 길어 비교적 수속이 수월한 중국에서 아기를 입양하였다.  

동생인 그 아기는 태어날 적부터 언청이라는 장애를 지닌 아기였다.


이 아기를 수술시켜 데려오느라 부부는
현지에 가서 두 달을 머물면서 기다리다 아기를 안고 왔다.

아빠 팔에 안긴 민수에게 '니 동생 어딨어?' 하고 물으면, 인중의 수술 자국이 아직도 덜 아문 채로 엄마 품에서 새근새근 잠든 까만 머리 아가를  곧장 가리킨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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