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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1. 2024

담배꽃


​한 남자가 버스터미널 나무의자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맛지게 머금었던 연기를 천천히 뿜어낸다. 깊디깊은 한숨 내뱉듯이. 명주실처럼 피어오르는 자색 연기가 이윽고 허공중에 사라져 버린다. 매캐한 약간의 냄새 외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바람처럼 흩어지고 마는 허망 그 자체인 담배연기.



외숙모는 그렇게 공허로이 이승과 작별했다. 한 점 혈육도 남기지 못하고 담배연기마냥 덧없이 스러져 갔다. 오십의 한 생애가 그리도 허망할 수 없었다. 한여름 잠시 돋았다 아쉽게 사라지는 무지개였다. 시나브로 증발해버린 아침이슬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다. 찬연한 예술로 혹은 위대한 업적으로 한평생 살고 간 자취 뚜렷이 각인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보통은 자손으로 이 세상에 나왔던 표를 남긴다. 불임의 외숙모에게야 그마저 가망 없는 한낱 꿈일 뿐이었으니. 무자식 상팔자, 말이 그러하지 절손의 형벌만큼 모진 게 없거늘 기박하게도 배태조차 못해 본 외숙모.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여인의 깊은 한 때문일까. 외삼촌도 피우지 않는 담배를 외숙모는 검지와 장지가 샛노랗도록 무시로 즐겼다.



내 유년의 뜰에 내려서면 언제나 반색을 하고 거기 서있는 외숙모. 그분이 내게 쏟은 애정의 질량은 본능적이라는 모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집에 가는 나를 배웅하고는 솔밭에 들어가 하염없이 흐느꼈다는 외숙모. 지나던 사람이 발길 멈추고 사연을 묻기에 짐짓, 아들 군대 보내고 오는 길이라며 목놓아 울었다는 외숙모다. 나 역시 외숙모와 떨어지기 싫어 장롱 속에 꼭꼭 숨은 채로 나오지 않아 엄마 애를 태우게도 했다는데.



5-60년대의 농촌 살림을 살았어도 정미소를 운영하여 험한 농사 일이나 궁핍 같은 건 겪지 않은 외숙모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 슬하에 자손이 없었다. 집안의 훈기이자 활력소 그 자체인 아이가 없다 보니 웃을 일도 없고 늘 건조하기만 하던 분위기. 그나마 외숙모의 시름과 수심의 그늘을 지워주는 역할을 하는 게 나였다. 어린 생질녀로 하여 비로소 집안에 웃음소리와 활력이 감돌았으니, 외숙 내외분이 나를 귀애함은 친자식 이상이었다. 자연히 나는 외삼촌 네를 집보다 더 좋아했다. 방학은 물론 주말마다 삼십 리 길 마다 않고 내달릴 정도로.



산야에 녹음 깊고 메꽃이 지천으로 깔린 하지 무렵. 우연찮게 열린 고향행이다. 어린 날의 추억이 수 놓인 데다 외숙 내외분이 영면에 드신 그곳. 교차되는 애틋함과 설렘을 싣고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당진 읍내를 지나 대호지 방향으로 접어들자 눈에 드는 밭이랑 거지반이 담배밭 일색이었다. 의젓한 덩치에 묵직하게 넌출거리는 크고 너른 잎새가 외래 식물인 컴프리와 비슷한 담배다.



건조한 토질에 적합하다는 담배농사가 지역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걸까. 군내에 재배 신청 농가가 계속 늘어난다는 옆 좌석 아낙의 자긍심 어린 설명이다. 그만큼 농가 소득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효자품종도 달리 없다는 부언을 잊지 않는다. 담배 농사는 밑거름만 충실히 해주면 병충해 염려도 적을뿐더러 뱀도 꼬이지 않는 데다 잔 손길이 별로 가지 않아 농사짓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이라고 한다. 전매품인 담배인지라 전량 수매를 원칙으로 하는 계약재배를 하기 때문에 판로 걱정도 없단다. 종자를 배당받아 파종한 뒤 순을 잡아주고 꽃을 따주는 품 수고만 하면 저 혼자 쑥쑥 자란다는 담배.



그 옛날 예닐곱 적, 외숙모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나선 담배밭에서 내가 해 본 일은 꽃따기였다. 이파리가 무성한 줄기의 맨 끝 대궁에 수줍은 듯 연분홍으로 설핏 피어난 담배꽃. 뎅겅 잘리는 꽃대를 안쓰럽게 여겼던 기억보다는, 높다란 담배 키를 따라잡자면 까치발을 하고도 항상 모자랐던 팔 길이만 생각켜진다. 그렇게 휘어잡다 줄기가 꺾이면 외숙모는 "내 심심초 순한 걸로 장만했구나." 하면서 대궁 째로 허리춤에 끼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푸르른 담배 아랫단이 누렇게 익어 잎을 딸 시기가 가까운 듯했다. 밑자락부터 따낸 담뱃잎을 줄줄이 볏짚으로 엮어 그늘진 데다 말리던 정경이며, 껑충하게 솟은 담배건조장의 황토벽 풍경이 한 장 삽화되어 되살아난다. 신문지 쪼가리도 귀해 거친 갈잎에 말아 피우던 머슴 오빠의 엽연초 독한 내음까지도.



식물에게 있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전력을 기울여 생애를 마무리 짓는 대역사이다. 뿌듯한 절정의 순간, 그러나 경제성 및 효율성이 우선인 재배농가의 입장으로는 그마저 용납해선 안된다. 온 기운과 영양의 총 결집인 꽃을 불필요하게 개화시키느니 더 유용한 방향으로 영양소를 돌리겠다는 발상은 합리적인 영농과학의 소산이리라.



감자알을 굵게 하려고 감자꽃을 따내듯 담뱃잎을 실하게 키우려면 담배꽃을 미리 따줘야 한다. 종자식물의 번식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진 꽃. 대부분의 식물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그 속에 씨를 품어 다음 대를 예비한다. 꽃은 맺었으되 제 몫을 다 못하고 하릴없이 밭고랑에서 시들어버려야 하는 담배꽃.



종족 번식 수단으로 피우는 꽃을 인위적으로 거세당한 담배꽃의 비탄쯤이야 위무될 수 있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봉오리조차 품어보지 못한 통한을 한숨 토하듯 담배연기로 날리며 한세상 적막하게 마감한 외숙모. 안타까운 건 미완으로 끝난 무용(無用)의 세월이다. 더욱이 풀숲 봉분마저 기억하는 후손 없이 쓸쓸하게 잊혀짐이다. 내 회포만 애연할 따름인가. 차창밖엔 녹음 욱욱청청하다.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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