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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3. 2024

평화로운 소떼와 잣성이 기다리는 물영아리

한라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 물영아리 오름에 다녀왔다.

분화구에 물이 고인 습지를 품고 있어 '물'영아리, 영아리는 신령스러운 산이란 제주어다.

람사르 습지로 지정된 보호 구역인 점에 호기심 동했더랬는데 초입에서 뜻밖에도 목가적인 풍경과 조우했다.

초지에 방목된 소떼들이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평화스러워 보였다.

홀스타인이나 블랙 앵거스 같은 외래종도 아닌 순수 한우, 눗누렇고 눈매 선한 토종 소라서 더욱 미쁜 걸까.

걸음 멈추고 한참을 서서 바라보고도 다시 뒤돌아 그윽이 지켜보았다.

정지용의 시 '향수'가 낮은 가락을 타고 흘러 다닐 거 같았다.




물영아리, 이름이 착 스며들기도 했지만 서귀포시에 있는 람사르 습지라서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다.

과문한 탓에 실은 제주에 오기 전, 람사르 습지로 공식 인정된 곳이 스물네 개나 되는 줄 몰랐다.

더구나 화산섬 제주에 습지가 있을 거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다만 부산에서 머잖은 경남 창녕 우포늪과 주산지가 우리나라 람사르 습지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한국 최대의 자연 늪이자 내륙 습지로 람사르 협약에 등록돼 보호받는 대표적인 습지가 우포늪이다.

사진작가들이 자욱하게 물안개 오르는 일출과 일몰 시 찍은 영상이 신비감을 자아내기에 아주 인기 있는 출사 장소다.  

청송에 있는 주산 습지 또한 새잎 피는 봄, 안갯속에 고목인 왕버들 물속에 뿌리내린 채 반영 되비치는 사진 다분히 몽환적이었다.


습지는 늪이나 저수지로만 국한했지 개념의 폭이 좁아서인지 갯벌이며 강원도 산간 늪까지 습지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몇 번이나 가본 순천만조차 람사르 습지라는 데 방점을 찍지 않을 만큼 무신경했다.

람사르 습지란 '희귀 동식물종의 서식지 또는 물새 서식지로서의 국제적 중요성을 가진 습지를 보호하기 위한 국제환경협약'이다.

제주로 옮겨와 살면서 동백동산에 갔다가 섬 안에 다섯 개의 람사르 습지가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됐다.

물영아리오름 /물장오리오름 / 1100 고지습지 /동백동산습지 /제주숨은물뱅듸가 그들이다.

심지어 선흘 곶자왈이자 동백동산 습지가 있는 제주 조천읍은 순천시, 창녕군, 인제군 등과 함께 '람사르 습지도시'로 인증됐다.

그간 걸핏하면 올라갔던 1100 고지 습지가 람사르 습지라는 거 조차 인지하지 못했으니 말해 무엇하랴.

물영아리 생태공원 입구를 통과해 목초지에서 평화스러이 되새김질하는 소떼 구경하다가 삼나무 숲길에 이르렀다.

흙길 한갓지게 슬슬 걷던 중 불현듯 나타난 가풀막진 층계.


그것도 천상 사다리 같이 천 개나 된다는 계단을 도리없이 꾸역꾸역 올라갔다.

다리 후들거릴 만큼 계단이 많아 중간중간 쉼터가 마련돼 있었는데 잠시 멈춰 호흡 가다듬으라는 듯 편 편의 시가 기다렸다.

삼나무 숲이 끝나고 잡목림이 나타나는 걸로 미루어 얼추 고지에 다다른 듯했으나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그렇게 다음 시를 기대하면서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마침내 하늘 훤하게 보였다.

산정 세 갈래 길에서 주저 없이 습지보호지역으로 내려갔다.

강우량이 적은 탓인지 여기저 조그만 웅덩이물이 약간 고여있었다.

국내 다섯 번째로 람사르 협약에 등록된 습지로 삼백 여개의 오름을 가진 제주에서도 단 두 곳뿐인 습지 중 하나가 물영아리 습지다.

물영아리 습지의 가치는 규모보다 생태적 희소성에서 찾을 수 있다고.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물이며 삼광조, 휘파람새, 흰 눈썹 황금새 등과 야생 노루의 주요 생활 터전이라는 이곳이다.


세모고랭이, 물고추나물, 마름, 고마리, 가막사리, 참개구리, 도마뱀, 유혈목, 물장군, 맹꽁이 등이 살고 있다지만 직접은 아무 것도 못 봤다.

국내 수서곤충 중에서 크기가 가장 큰 물장군은 멸종위기종, 여기서 물장군이 독침으로 개구리를 잡는 모습까지 관찰됐다는데....

'하늘이 빚은 큰 대접에 꽃꽂이가 한창'이라고 쓴 제주도 시인은 '무성한 수초 사이로 물뱀이 날아갈 듯' 하다고도 읊었는데....

전망대 아래를 두루 살피고 있는데 먼 어드메선가 우르릉 쾅 천둥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타다닥 계단을 올라가 정상에서 반대 방향 길로 접어들었다.


산정에서 동쪽으로 바라다 뵈는 풍력발전 단지의 바람개비와 둥실둥실 솟아있는 뭇 오름들.

민오름 까끄레기오름 거문오름 거친오름 제오름 소록산 대록산 백악이오름 개오름 따라비오름 새끼오름 등등 무수했다.

지난가을 따라비오름에 올랐을 때도 조망권 시원해 이와 비슷한 전경을 마주했던 기억이 스쳐갔다.

그때도 서북쪽으로는 표선면 가시리에 있는 정석비행장 널펀펀한 활주로가 내려다보였다.

이른 봄 두릅과 고사리를 보았던 큰사슴 오름 꼭대기에서도 동일한 풍경을 보았기에 머릿속에 인근 지도가 대충 그려졌다.

하산은 물보라길을 따라 완만한 오름 치맛단 밟으며 반대로 걷기로 했다.

잣성을 만나 이끼 낀 돌담을 거치는 동안 날씨 상냥하게 개여 산딸기를 따먹고 멍게열매 사진에 담아 가며 쉬엄쉬엄 수월하게 내려왔다.


물영아리 오름은 소떼와 습지를 비롯해 챙겨 볼거리가 의외로 많았다.


수망리 중잣성도 그중 하나로 거기서부터 잣성 생태탐방로를 따라 걸었다.

제주에서 돌담을 쌓기 시작한 것은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탐라 판관을 지낸 김구(金丘)에 의해서라고 한다.

고려 고종 때 제주에 부임한 김구는 서기 1234년부터 밭담 쌓기를 도민들에게 가르쳤다고.

태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면 밭의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생기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경계 삼아 밭담을 쌓도록 했던 것.


어딜 가나 화산섬 제주에 흔하게 널려있는 게 현무암이다.

토지 분쟁, 우마의 침입, 풍해까지 방지하는 효과를 보게 되자 그 후부터 돌담의 쓰임은 다양하게 넓혀졌다.

물론 그에 따른 명칭도 달랐다.

돌을 이용해 집에는 울(축) 담, 마당과 거릿길을 잇는 올레담, 밭과 밭의 경계를 짓는 밭담을 시작으로 범위 점점 넓혀졌다.

산소를 둘러싼 산담, 연안 해안가에는 고기를 포획하기 위한 원담을 만들었다.

우마 분실을 막고 목장 간 경계용으로 쌓은 잣성(잣담), 외적 방어용으로 높고 견고하게 성담도 쌓았다.




오래 전인 탐라국 시절, 몽골이 제주를 지배하며 마소를 산지 초원에 방목해 키웠다.


골족 목호의 난 이후 그들이 사라졌어도 제주에는 고려조와 조선조로 이어져 온 목축문화가 성했다.


마소 방목장의 흔적이자 유산인 잣성을 물영아리에서 만났다.


언젠가 족은노꼬메오름을 걷다가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된 잣성과 해후한 이래 처음이다.

잣성은 제주도의 전통적인 목축 문화 유물로 목초지에 쌓아 놓은 경계용 돌담을 이른다.

조선시대 때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국영 마목장을 만들면서 겹담 형태의 잣성을 길게 축조했다.

마소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마을 농작물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마소가 뛰어넘지 못할 높이로 돌을 쌓아 올렸던 것.

세종실록에 따르면 한라산과 중산간을 한바퀴 빙 둘러 165리에 축담 되었다고 쓰여있다.

제주시 일원의 상잣성은 산마감목관인 헌마공신 김만일이 관할하였다.

동부 중산간 지역 주민들 동원해 축담 된 중잣성, 하잣성은 길이가 2~3킬로에 달한다고 한다.

미끈하게 쭉쭉 뻗은 편백나무 삼나무 숲 울창해 그늘 깊어서인지 잣성은 이끼 두터이 껴있었다.


물의 마을 수망리라서 일까, 키 낮은 식물들은 햇볕 닿지 못해도 푸른 기운 왕성했다.

초목들 저마다 한껏 생기 넘칠 장마철이 열리는 유월도 점점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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