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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19. 2024

물찻오름, 비밀의 숲에 오르다

제주의 유월은 중순만 지나면 장마철이 시작된다.

올해도 19일 밤부터 장맛비가 쏟아진다는데 그다음 날은 폭우까지 퍼부을 거라는 예보가 떴다.

관광지 제주에서 비? 그렇다고 여행 와서 카페에 죽치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잖은가.

비가 안개처럼 내리는 날 갈만한 곳은 단연 숲이다.

비자림은 빗줄기 굵은 날 가야 제격인 반면 사려니숲은 안개비 젖어들 때 찾아야 운치 있다.

주룩주룩 내리는 거센 빗발이 약초마다 터치해 숲 온 데서 한약방 내음 번지는 비자림.

이때는 우산을 두드리는 빗줄기의 리듬 음미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려니숲은 우비를 입고 은사 같은 실비나 습습하게 스며드는 안개비에 젖어볼 일이다.  



이름도 착 안겨드는 데다 어느 계절 없 찾아도 사철 좋은 사려니숲.

사려니숲 산수국길 따라 한 시간여 걷다 보면 만나는 삼거리 좌측은 한라산 둘레길, 우측은 물찻오름길이다.

처음 이 자리에 섰을 때, 열다섯 해째 휴식년에 들어간 물찻오름이라 올라갈 수가 없노라 했다.

사라오름처럼 분화구에 물이 고인 산정 호수가 숨겨져 있다는 말에 더 가보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호기심 한껏 부풀어 올랐다.

물이 차있는 오름이라 물찻오름, 水城岳이란 이름도 있는데 못 언저리에 잣성처럼 석벽이 있어서라고.

지난해 오름 탐방로를 열기로 했으나 시설 보완이 필요하다며 개방 시기를 일단 보류시켰단다.

대신 일 년에 닷새씩 한시적으로 사전 예약자에 한해 탐방이 허용된다.

오전 10시부터 낮 12시 30분까지 30분 간격을 두고  20명 단위로 일정 진행한다.

 

 

지나간 뉴스기사를 훑다가 '사려니숲 에코힐링체험' 프로그램에 찻물오름 탐방도 들어있다는 걸 봤다.

뒤늦게 안 까닭에 전화를 건 때는 이미 예약이 다 차서 대기자로 예약을 해뒀다.

주말을 피해 마지막 날인 화요일을 택했다.

오전 열 시 대기표 넘버는 25번, 간당간당했다.

그래도 일단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기로 작정하고 일요일 현장답사차 사려니숲으로 향했다. 

버스 이동시 소요시간과 사려니숲부터 물찻오름 집결지까지 내 걸음으로 얼마나 걸리나 체크하기 위해서다.  

232번 버스로 사려니숲까지 딱 한 시간, 물찻오름 집결지까지는 5.2킬로라 한 시간 넘게 걸어야 했다.

나름 물찻오름 탐방에 공을 들이며 내심 이번은 성공할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요일 내내 비가 내리더니 어제는 다행히도 쾌청한 날씨에 맑게 씻긴 대기 투명했다.

새벽부터 일어나 일찌감치 준비를 하고 나서니 한라산도 어느 때보다 정갈한 얼굴로 마주 다가왔다.

이른 아침 사려니숲은 청량한 새소리뿐 어쩌다 산책객 하나씩 오갔다.  

통째로 전세 내다시피 한 숲에서 푸른 공기 깊이 심호흡하면서 팔 힘차게 내두르며 걸었다.

물찻오름 초입에 일착으로 이르러 바짝 문 앞에서 기다렸다.

첫 번째 회차에서 안되면 마지막 회차인 여섯 번째까지도 대기자로 서있을 심산이었다.

열 시 타임에 결원이 네 명, 대기자 중 운 좋게도 호명이 되는 순간 회심의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얏호! 환호하거나 어퍼컷 날리지는 않았어도 그만큼 날아갈듯한 기분이었다.



스무 명의 탐방객을 안내하는 자연해설사와 함께 우선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신체를 풀어줬다.

바람결도 신선했고 저마다 심신도 상쾌, 비밀의 숲에 대한 기대로 들떠 죄다 상기된 표정들.

물찻오름 들머리는 황토흙길로 시작됐으며 숲 속은 활엽수만으로 빼곡히 뒤덮여 있었다.

신록이 눈부신만치 가을철 단풍도 꽤 볼만하겠다 싶었다. 

소나무 같은 침엽수는 전혀 섞이지 않은 식생이라 주로 졸참나무 서어나무 쥐똥나무 등이 우거진 숲.

흔한 산딸나무는 하나같이 하늘 향해 하얀 네 장의 꽃잎 펼치고 촘촘 어우러졌다.

지표면에는 양치식물과 제주조릿대가 빈틈없이 깔려있었으나 의외로 야생초는 거의 눈에 뜨지 않았다.

일행은 한 줄로 서서 조붓한 매트길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부지런히 걸었다.

돌무더기는 별로 없는데 쇠살모사 같은 독한 비암이 흔하다며 앞장선 안내자가 나무막대기로 길을 터주었다.

워낙 그늘지고 습습해 파충류가 서식하기 알맞은 여건인 데다 십육 년간이나 인적 없으니 그들만의 천국일 법.



가파른 언덕을 잠시 오르자 산정호수 전망대 자리 데크가 나타났다.

저 아래 무성한 나무들 서로 얼크러 설크러 뒤엉긴 낭떠러지 너머로 연둣빛 윤슬이 반짝대는 게 보였다.

윤슬 아니면 호수라는 감이 잡히지도 않을 정도로 거리 한참되는데 그게 산정호수란다.

사진 통해 보았던 보석 같은 호수 정경은 드론으로 촬영해야 면모가 잡히려나 휴대폰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2008년 이전에는 아무라도 호숫가까지 내려가 사진을 찍었다는데 지금은 유추하기조차도 어렵다.

입산이 통제되기 전, 인근은 표고버섯 재배지로 적격지라서 사람들 왕래가 빈번했다고 한다.

버섯농장 인부들이 산정호수에 붕어를 풀어놓자 얼마 후 개체수가 엄청 늘어나 여기서 낚시를 즐겼다고.

불어난 낚시꾼에다 심지어 희귀 식물이나 화산석을 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져 급격하게 자연이 훼손됐고 문이 닫혔다고.

그 바람에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돼 오름 환경이 이만큼이나마 보전될 수 있었다는 것.

 


뭔가 미진한 아쉬움 뒤로하고 오름 정상으로 향했다.

요즘 갑작스레 유례없던 유월 폭염이 덮쳐 삼십 도를 훌쩍 넘는 기온, 그러나 현지 기온은 삽상한 22도.

게다가 올라갈수록 바람맛 시원해졌다.

이제 곧 눈맛이 시원해질 차례다.

정상 전망대에 다다르자 전면 가득 탁 트인 조망권에 마침내 눈맛은 물론 흉금까지 시원해졌다.

서귀포에서와는 다른 한라산 백록담 전경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맞아! 한라산은 동서남북이 다른 산이지.

눈앞에 펼쳐진 한라산을 중심으로 한 주변 오름들이 울멍줄멍 장관 이룬 데다 신록 바야흐로 녹을 깊어가고.

아~ 탄성 터지며 비로소 공들이고 학수고대한 보람이 정녕 있지 뭔가! 싶어졌다.

나무 울창해 시야 가리는 면도 적잖으나 전지 잘된 정원이 아닌 자연은 이처럼 제멋대로 거칠어야 저답다.

사람들 편의 위주로 안전하게 다듬어 놓고 매끄러이 손질된 숲이 아닌 원시의 숲이라서 더 좋은 이곳.

꼭 만나보고 싶은 이들만 일 년 간절히 기다려 오일 간만 오는, 비밀의 숲으로 남아있어도 좋을 찻물오름이다.



하산길은 올라오는 길 옆으로 따로 나있어 겹치지 않도록 배려해 놨다.

덕분에 한 시간 남짓만에 찻물오름 탐방을 가뿐히 마칠 수 있었다.

높이는 717.2m이나 비고는 167m라서 비교적 걷기 좋은 낮은 오름이라 누구나 수월하게 오를 수는 있다.

다만 휴식년이 길어져 언제 입산 통제가 풀릴지 모르나 작정하고 있다가 한시 개방 기간 활용하면 되겠다.

기다리는 맛도 미상불 근사하니까.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만판 자유로이 개방돼 있는 것보다 또는 드물어 귀하기에 더 입맛 당기게 하는 희소가치!

다시 사려니 산수국길 되짚어 뿌듯한 마음으로 유유자적 내려오는데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오후 일이 있어 이것저것 한눈팔지 않고 곧장 걸으며 삼라만상과 인연 모두에 감사 거듭 감사....   

숲을 벗어나 남조로 큰 길가에 나서니 후끈~ 무더위가 실감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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