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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1. 2024

상록수 작가의 이면

장구경이나 슬슬하려고 예정 없이 찾았던 고향땅 당진에서 계획에 없는 심훈을 만나게 되었다오.   

당진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언뜻 필경사(筆耕舍)란 표식이 든 이정표를 만났던 것이외다.


즉각 차를 돌렸소이다.

소설 상록수 배경인 당진 초입 한곡리는 내 학창시절 기억으로도 가난에 찌든 빈촌이었소이다


지금은 인근 바다를 메워 건립한 국가산업단지 위용이 압도해 와 마치 딴 나라같이 낯설게 느껴지더이다.

국도에서 황토 언덕을 따라 나있는 농촌마을 소로로 접어들어 꽤 한참을 달리자 필경사가 나타났소.  

붓으로 밭을 일구겠노라는 필경사(충남 기념물 제107호), 심훈이 상록수를 쓴 문학의 산실이라오.

소설 상록수, 농촌계몽운동에 투신한 두 젊은이가 뜻한 바 꿈을 이룬 뒤 혼인하자는 약조를 한다오.


그러나 불철주야 문맹 퇴치를 위해 헌신하던 여주인공 채영신이 과로로 쓰러지며 미완으로 마무리되고 만다오.  

심훈은 일제에 대한 무모한 무력항쟁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하고 문학으로 민중의 혼을 일깨우기로 했다 하외다.

그렇게 쓰인 상록수는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계몽소설로 자리 잡게 되었다오.

바로 이 필경사를 탯자리로 해서 태어난 셋째 아들 심재호 씨와 장손인 심천보 씨가 고인의 삶을 더듬어나가며 모아둔 자료와 가내 유품을 당진시에 기증해 오늘의 심훈기념관을 내실 알차게 가꿀 수 있도록 하였더이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좌측으로 예전 모습을 복원한 한옥 필경사가 자리 잡았고 우측 편에 현대식 건물이 기다리고 있었소


거기에는 심훈이 쓰던 책상과 친필 원고 사진 등 심훈 35년 생애를 반추해 볼 수 있는 귀한 흔적들이 전시돼 있더이다.

일제의 출판 불허 도장이 찍힌 '그날의 오면' 검열판, 서대전 감옥 수감 기록과 어머니께 보낸 편지, '먼동이 틀 때'영화 각본과 포스터도 있었소.

소설 '상록수'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 최용신이 친우 김활란과 찍은 사진, 당진시 부곡리 공동경작회 회원 사진 등이 당시를 생생히 증언해 주더이다.

밭 가는 농부의 마음으로 글을 쓰고자 한 그는 어느 날 신문을 보던 중에, YMCA 활동으로 샘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26세 젊은 나이에 과로로 요절한 여성에 대한 기사를 읽고는 즉시 상록수 소설의 모티브를 잡았다 하오.  

상록수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채영신은 미담 기사 속의 여성인 최용신이며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인물은 직접 농촌계몽운동을 해온 장조카 심재영이 모델이었소.

소설 속의 연인들인 최용신과 심재영은 사실 일면식도 없는 사이로 작가의 무한 상상력이 두 사람을 엮어 상록수라는 소설을 탄생시킨 거였다오.



심훈(沈熏, 1901년 ~ 1936년)은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배우, 영화감독, 각본가로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서울 흑석동 출생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호는 해풍(海風)이며 전통적 양반 가문의 지주층인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소.

주요 저서로는 '상록수'와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이 있으며 다수의 소설과 시를 남겼다는 심훈.

경성 제1 고보 4학년 재학 중이던 1919년 학생시위에 관련돼 투옥되었다가 8개월 형을 받고 나온 후 퇴학처분을 받았다 하외다.

당시 경성 고보에서 동문수학한 동창 중에는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북으로 간 박헌영이 포함되었더라오.

1920년 상해로 건너가 위안장 대학교 철학과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중퇴하고 항주에 있는 저장대학교 극문학과에 다시 입학을 하게 되었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가 선택한 학과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국문학과가 아니라 극문학과 란 곳이오.

허나 극문화과마저 다음 해 자퇴하고는 직접 극문회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하였소.

이때 신채호 선생 등과 교류하며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이 은연중 심어지게 되지 않았나 싶소이다.

왜냐하면 친일단체를 이끈 전력의 형에다 친일적 시류에 순응하는 집안 출신인 그였기 때문이라오.

1924년 중국에서 돌아와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해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철필 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하오.

1927년 일본에 가서 영화를 공부한 다음 식민지 현실을 다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찍어 단성사에서 상연하기도 했다오.

한마디로 그는 '먼동이 틀 때'의 집필, 각색, 감독에 영화배우 역까지 맡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준 전방위 예술가였소.

그는 독립운동가, 소설가, 시인, 언론인, 영화감독에 배우까지 일인 다역을 소화해 낸, 지식층 독립운동가이자 당대의 첨단
모던파로 사진에서 보다시피 보기 드문 미남이었소이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과 '불사조'를 연재하다가 게재 중지 조치를 당한 그.,


시집 '그날이 오면' 출간도 1932년 일제의 검열에 걸려 좌절되고 만다오.

잠시 방송국에서 일하기도 하나 일제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반골 기질상 오래 자리를 지키고 못하고 실직 상태가 되었다 하오.


이후 그는 장조카 심재영이 살고 있는 당진으로 내려와서 초가 누옥에 필경사란 옥호를 걸고 글만 쓴다오.

심재영은 1930년 진작에 뜻한 바 있어 부곡리에 정착하여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운영하는 한편 공동경작회(共同耕作會)로 농촌계몽운동을 하며 지내고 있었더랬소.

때마침 동아일보가 창간 15주년을 맞아 농어촌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공모한다는 기사를 본 그. 


그날로부터 55일 만에 소설을 탈고해
장편 한 편이 탄생했으며 그 상록수가 당선작으로 뽑힌 것이라 하오.

이때 받은 상금으로 그는 상록학원을 세워 배움에 주린 학생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하외다.



여기까지는 공인으로서의 백과 사전식 설명이고 문화해설사가 들려준 그의 이면사가 더 흥미진진하더이다.

일제강점기의 소설가요 시인이며 언론인에 교육가, 영화감독에 배우에 영화평론가에 아나운서이기도 했던 그였소이다.

소파 방정환과 빈처의 작가 현진건은 그의 문우요, 반달을 쓴 윤극영은 그의 외사촌 동생이었던 심훈.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해 프롤레타리아예술가 동맹의 작가이기도 하였소.

아버지 영향인지 시대적 조류인지 아무튼 장남 심재건은 의용군으로 월북했다 하고 두 아들은 미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더이다.

각설하고, 그는 열일곱 나이에 이왕가의 후손인 이해영과 혼인하지만 계속 국외로 떠돌다가 1924년 아내와 헤어진 다오.

혼자가 된 다음 연극과 영화에 전념하며 장한몽에서는 이수일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오.

1930년 그는 열아홉 무희였던 안정옥을 만나 재혼하여 3 남을 얻게 된다오.


하지만 안정된 가정의 행복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여섯 해 뒤 장질부사로 눈을 감고 말았으니 미인박명이 허사가 아닌가 보오.

여기서 작은 에피소드 하나, 오래된 가족사진 앞에 서더니 문화해설사가 질문을 하는 거였소.

이 사진은 심훈 선생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일가붙이가 모여 찍은 사진인데 요기 잘 보시면 얼굴이 긁혀 훼손된 분이 있어요.

그분이 심훈 선생인데요 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누군가 그가 꼴도 보기 싫게 미웠던가 보네요.


ㅎㅎ 아마도 그렇겠지요? 하면서 아내 자리에서 밀려난 첫 부인을 동시에 지목했소이다.

열한 살 차이 나는 두 번째 부인을 맞은 남편이 미워 그랬을 게 틀림없다며 우린 한바탕 웃었다오.

그러나 시 '그날이 오면' 앞에 서니 웃음 거뒤 지며 숙연해질 수밖에 없더이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三角山)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鐘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恨)이 남으오리까.


....후략


일제 강점기에 광복의 그날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담긴 이 시를 통해 심훈은 조국 해방의 의지를 이토록 뜨겁게 노래하였소.

치열한 저항정신을 격정적인 어조로 쏟아놓은 시 '그날이 오면'으로 훗날 그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며 시로 저항한 독립
운동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오.

그러나 민족계몽가요 저항 시인으로 만 알았던 농촌소설 상록수 작가의 또 다른 면을 들여다보니 뭐랄까 기분 참 묘해지더이다.

상상컨대 어딘지 소박하면서도 강직한 인상의 시골 선생 같은 이미지를 그려왔는데, 그 시대 인텔리의 상징 같은 둥근 뿔테안경의
너무도 핸섬한 그를 보자 왠지...  


휴머니즘과 저항의식과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농민계몽문학의 장르를 연 그.


하지만 그는 다분히 도회적이며 당대로서는 시대를 한참 앞서가는 모던한 사고의 소유자이기도 하였소.

문재 뛰어난 데다 다재다능한 여러 장기를 지닌 그는 두주불사의 한량이자 초일류급 멋쟁이였다 하오.

1929년에 쓰인 그의 다른 시 '야구'로 또 다른 면모를 선보이며 한 시대를 풍미한 상록수의 심훈 선생이었더이다.



야구



식지 않는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오라!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유월의 태양이 끓어오르는 그라운드에

상록수와 같이 버티고 선 점.점.점....

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에는

붉은 피가 쭈 ㄱ 쭈 ㄱ 뻗어흐른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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