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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1. 2024

그를 꿈꾸며


창 가득 순애처럼 내리는 비. 안개비 젖어드는 유월 아침은 바이올린 선율에 잠기고 싶다. 아다지오 낮게 떨리는 물보라 저 건너로 청산이 자라는 소리. 굳이 벽에 걸지 않아도 신기(神技)에 다다른 수묵화 한 폭 지니고 사는 이 무상의 은혜. 다만 비 오는 날이나 누릴 수 있는 청복임이 아쉽지만 이쯤으로도 대견하고 황감하다. 


단오 무렵이라서일까. 창포물에 머리 감아 빗고 함초롬이 윤기 더하는 신록의 숲. 아른거리는 주아사 겹으로 드리우고 한창 맵시 고르는 신부인가. 그러나 다시 보면 태(態) 달리하는 산. 잦추는 안개의 보챔으로 혹여는 바다에 뜬 섬과도 같고 신라 옛터의 고분군으로도 보인다. 어느 땐 얼음 언 호수였다가 잿빛 침묵의 바다였다가 다시 산이 되어 돌아오는 신비. 빗무리 쓸리는 바람결 따라 골 드러나고 겹쳐졌던 산이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여지껏은 한 덩어리 산이었다. 산세 끊어짐 없이 띠 이룬 한줄기 맥(脈)이었다. 아이들 그림 마냥 높낮이 두어 번 휘어진 산. 서리서리 안개 품고 살풋 눈 내리깐 채 비밀한 모의라도 꾸미 듯한 산. 또는 늘 홀로 고적해 삭연(索然)하기조차 하던 산. 그저 하나로 뭉뚱그려졌던 산이 제가끔 고유 모습 되찾아 또렷한 윤곽으로 일어선다. 눈썹 그린 양 떠오르는 산의 실루엣. 그리하여 낱낱의 타인으로 외떨어지는 산. 허나 부드러이 어깨며 이마 기댄 유정함이 체온을 데우는가, 다시금 이는 안개.


맑은 날은 따로이 볼 수 없던 봉우리와 골짜기가 빗속이나 안개 갈피에선 각각의 윤곽 선연히 드러내다니 신기로운 노릇이다. 그래서일까. 시야 흐리면서도 맑아지는 눈. 눈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열리는 기척. 비로 하여 되살아 나는 건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다. 잊었던 이야기들도 가닥가닥 되살아 다가선다. 잠자던 그에 대한 열망, 뜨겁게 깨어나 앉는다. 속 깊숙이 간직해 둔 은밀한 기억마저 애수의 빛깔로 발아해 버리는 날. 먼데 기적조차 울림 그윽해지는가 하면 파삭하니 메마르던 심상에 번져지는 물기.


상(想)이 잡힐 듯도 하다. 글이 써질 것 같다. 허황되이 부유하던 마음결 다듬어 수틀에 가만 얹는다. 흐트러진 색실 올 고르며 한 땀씩 뜬 비단자수 모습 갖춰 나오려나. 비록 고운 수 아니 되면 어떠랴. 어설픈 솜씨일지라도 그 작업은 생명의 무늬 놓음임에야.


평소 햇빛 부시도록 화창한 날은 맹송하니 글이 되질 않는다. 어수룩한 꿈 따위 끼어들 여지가 없으므로 생각이 하나에서 더 이상의 가지를 못 친다. 상상도 금방 싱거워지고 목전에서 곧 드러나는 한계, 그 막막한 단애(斷崖). 억지로 붙안고 씨름해서 될 일도 아니다. 그냥 잊은 듯 덮어두고 얼마쯤 내버려 놓는다. 하다 보면 그간 제법 풀잎 나붓거리고 들꽃일 망정 소롯이 피어 향 서리던 뜰이 푸석푸석 먼지나 날리는 불모지로 변한다. 생활의 타성에 천천히 각질화되어가는 자신. 마치 지구의 기온상승과 극심한 한발로 초원이 점차 사막화되듯이.


기가 차도록 막막하다. 한 줄의 글마저 잡히지 않는다. 조바심내면 낼수록 더욱 멀어지는 그. 문득 지척에서 느껴지다가도 손 내밀어 이끌려하면 아득히 사라지는 그. 야속하리만치 서늘히 뒤돌아 서는 그. 아니, 옴도 없고 감도 없는 그는 한갓 신기루였던가. 아예 잊자고 단념해 본다. 까맣게 묻어두고 맘 편히 허리에 군살 오르는 소리나 들으며 뒷짐 지고 살리라 작정을 한다. 누가 강요한 일도, 그렇다고 짐 지워진 숙제도 아니다. 까짓 거 없어도 그만이라 억지오기를 부려본다. 나만이 제게 헌신하며 순정 바치길 바라다니. 천만에, 나는 사양하겠어. 짐짓 토라져 모른척하면 아예 기척 없이 아득히 사라질 것만 같은 그. 그러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한층 더 간절해지는 그.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애물이었다. 


혼자만의 고요한 시각, 나지막이 부르면 어느덧 곁에 다가와 살 부비는 그였다. 절실한 목마름으로 아니면 선혈만큼 한 뜨거움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안겨드는 그였다. 그는 나의 애타게 그리운 기다림의 대상으로 저만치 서있는 빛이자 그림자였다. 그보다는 안타까운, 가슴 저리도록 안타까운 연인이었다. 생각하면 그만큼 가슴 울렁이게 하는 것이 달리 있으랴. 아픈 듯 기쁜 듯 마구 느껍게 하는 것이 또 있으랴. 


그는 꽃이다. 그는 햇살이다. 그는 별이고 구름이고 나아가 그는 외경스런 신(神) 이러니. 그를 향하여 늘상 순연히 타오르는 불꽃. 부디 혼신의 열정으로 목숨 잦아들어 형체 바숴져도 좋으리니 맘껏 타오르거라. 무섭게 격렬한 불길 속에 한 알 사리 남길 수 있다면 타고 또 탄들 어떠리.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하니 쟁여 놓은 게 아무것도 없다. 부스스한 검부러기 아무리 추스려도 건져 올릴 알곡이 없다. 답답해한다고 갑작스레 사색이 깊어질 수도, 철학이 생길 리도, 학문이 넓어질 바도 아니니 빈 우물에 헛 두레박질 격이다. 가슴속 절절한 그리움, 애마른 정한, 때로는 여울 되고 강물 되고 마침내 폭포 져 부서지며 휘날리며 작열하는 불꽃의 승천이듯 그렇게 글은 태어나기도 했다. 허나 지성의 기반이 없는 서정은 값싼 애상일 뿐. 순수에 가산점을 준 소녀적 감상도 이 나이에 걸맞지 않은 치기. 공감의 파장 폭에 안심하고 출렁이며 펼쳐댄 일상 잡기는 몽롱히 잠 취한 소리 거나 앓는 얘기이기 일쑤.


매양 그게 그 모양인 닮은 꼴의 글에도 환멸이 느껴졌다. 애쓴다 하여 뻐꾸기가 꾀꼬리로 변할 수 없듯 고유색 지우고 틀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부질없는 그 시도는 혼돈의 어지럼증만 일으켰고 글은 점차 멀어졌다. 난감할 정도로 가뭇없이 멀리 떠나는 그. 기다릴 밖에 없었다. 태무심한 척하면서도 외골수로 줄기차게 그를 기다렸다. 샘물이 고이길 기다린 것이다. 맑은 물 가득 찰랑이는 샘터에서 잎새 접어 그 물 떠마시고 갈증 다스리리라 기대하면서. 


비가 나의 뜰에도 이적(異蹟)을 보이려는가. 풀릴 듯 잡힐 듯한 상. 빗속에 산이 깨어남처럼 눈뜨는 의식. 넋대 움켜쥔 양 생각 앞질러 춤추듯한 붓 한번 잡아보고 싶구나. 접신하듯 상이여, 술술 풀어져 거침없이 흘러나오렴.  그를 맞고자, 아니 그(글)와 한 몸 된 순간의 벅참을 위하여 한잔 차부터 준비해야겠다.    -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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