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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21. 2024

피아노 집

참 좋은 세상이다. 물론 느끼기 나름이긴 하나 사물을 인식하는 관점이 네거티브 쪽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처럼 매사 속 편하게 긍정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다 보면 살기 좋은 세상이란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그중 한 가지가 인터넷. 폐해도 적잖으나 사용하기에 따라 정말 요긴한 도우미가 되어준다. 온라인망으로 전 세계를 하나로 엮는 사이버 공간만이랴. 바로 눈앞인 오프라인 상에도 갖가지 살기 좋은 세상은 펼쳐져 있다.

  

한국에는 근자 들어 노래방 찜질방 숫자 못지않을 만큼 문화센터 문화교실이 흔하게 널려있다. 각 백화점이 다투어 고객 서비스 차원의 문화 센터를 운영하자 뒤이어 구청이며 동마다 제가끔 문화교실을 열기에 이르렀다. 취향 따라 고를 수 있게 다채로이 펼쳐진 수강과목들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질적으로 우수한 강사진에 알찬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그렇게 학생들을 기다린다. 언론사에서 처음으로 문화센터를 열던 때의 희소가치에 견주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다. 

 

문화센터 등록 문턱은 낮다. 관심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가 있다. 대학처럼 어려운 전문교육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학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연령제한도 없을뿐더러 일정 학력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니 자격의 평준화다. 수강 시간이 헐렁한 데다 공부라는 중압감으로 머리 무거울 일도 없다. 산책하듯 가벼이 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교육 내용들이 화려하게 전을 차렸다. 건강을 위한 기공체조에 요가며 수지침도 배운다. 첼로 교실도 있고 사진도 배우며 문학 공부도 할 수 있다. 사군자를 치고 다도를 익히고 외국어 강좌도 듣는다. 부동산 교실에 증권 강의가 있는가 하면 심지어 자서전 쓰기만을 중점 지도하는 곳도 있다.

 

자기 취미나 적성에 따라 다양하게 제공되는 문화 콘텐츠를 선택하여 약간의 시간만 투자하면 어느 것이라도 배움이 가능하다. 자기 계발을 위한 새로운 학습의 장이 이처럼 널찍이 열려있으므로 배우고자 하는 열의와 부지런만 따르면 기회는 숱하다. 누구라도 이제는 배우고 싶었는데 때를 놓쳤다거나 돈이 없다거나 하는 푸념을 할 수가 없게 된 세상이다. 그러나 잠시 거슬러 올라 80년대쯤만 해도 그 이름조차 생소한 문화센터.

 

지금은 대학 외에도 소설 학당 시 교실 등 문예 창작을 지도하는 곳이 얼마든지 있어 뜻만 있으면 관심분야에 맞춘 집중적인 공부가 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글쓰기에 갓 흥미를 느꼈던 80년대 초, 체계적인 글공부는커녕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을만한 데가 전무했다. 습작이 쌓여도 첨삭지도는 고사하고 조언 한마디 들을 곳이 없었다. 혼자 문장독본이나 읽어가며 그저 내 나름대로 쓰고 또 쓰며 여기저기 투고한 뒤 서평 한두 줄 받는 게 고작이었다. 기본 바탕도 다져지지 않은 데다 길잡이도 없이 맘 내키는 대로 마구 쓰다 보니 글꼴도 못 갖춘 풋내 나는 글. 그럼에도 가끔은 내 글에다 수필이니 시 대접을 해주는 곳이 있었다.

 

文理 文情은 물론이고 한동안 원고지 사용법도 옳게 몰랐을뿐더러 실제로 맞춤법 띄어쓰기도 엉터리였다. 독학의 한계였다. 끙끙대다가 홀연 길을 하나 만났다. 그즈음부터 책을 읽고 나면 반드시 독후감을 써 정리해 두었다. 제멋대로 무질서하던 글, 조악하기 그지없던 글이 차츰 틀을 잡아가며 다듬어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써둔 독후감이 꽤 모였던 85년, 중앙 일간지에서 주관한 독서감상문 공모에 최우수로 당선되며 부상으로는 피아노가 주어졌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상과 인연이 먼 나로서는 의외의 결과라 잠시 어리둥절했었다. 아마도 그때 <주홍 글씨>를 읽고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 기억마저 가물거린다. 아직도 선연한 건 자꾸만 입이 벙글던 그 붕 뜬 기분이다.

상으로 받게 된 피아노다. 당시 유행하던 조지 윈스턴의 피아노 연주. 그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터치에 꽤 빠져들었던 나였다. 실제 뉴에이지 음악으로 분류될 정도로 그의 연주는 몽환의 세계로 이끄는 마력이 있었다. 그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즐겨 듣던 나로선 피아노에 욕심이 날만도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도 피아노를 칠 줄 몰랐다. 이참에 피아노를 배워보라 하니 아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사래부터 쳤다. 상아빛으로 윤나는 피아노는 한 질의 브리태니커 사전과 마찬가지로 원래 용도와는 무관하게 일종의 집안 장식품으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장승 노릇이나 할 피아노일지라도 곁에 두고 바라만 봐도 내심 흐뭇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아쉬운 마음을 접고 피아노 대신 현금을 택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피아노 집이라니?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습소를 이르는 것도 아니다. 피아노 선율이 자주 흘러나오는 운치 있는 집 얘기도 아니다. 피아노 모형을 본떠서 지은 건축물도 아니다. 집이 된 피아노, 곧 피아노가 집이 된 해묵은 사연이 하나 있다. 피아노 대신 받은 백만 원을 종잣돈 삼아 우리는 네 식구가 살만한 자그만 아파트를 구입했다. 물론 패물도 다 처분해 보탰다. 앞서 살던 대구에 단독주택이 한 채 있었지만 그 집은 시어른이 장만해 준 터라 날름 처분할 수가 없어 전세를 놓고 왔다. 부산에 내려와서는 우리도 전세를 살고 있던 참이었다. 새로 장만한 집의 터는 문외한의 안목으로도 말 그대로 배산임수의 吉地였다. 아파트 뒤로는 솔숲 우거진 봉긋한 배산, 정면으로는 수영강과 먼바다가 한눈에 들었다. 

 

피아노 집은 삼대 적선해야 살 수 있다는 정남향 집인 데다 아주 전망 좋은 집이었다. 해운대 동백섬에 광안리 푸른 바다가 시야 가득 전개됐고 쾌청한 날엔 대마도가 아슴하니 떠오르기도 했다. 피아노 집에서의 십오 년 세월. 부침하는 五慾七情 끌어안고 살아가는 중생사다. 늘 조율 잘 된 조화로운 음률만이 흐르는 게 아니라 더러는 불협화음이 새나가기도 했지만 대체로 무탈했던 나날들. 평온한 일상 가운데 내심 바라던 꿈들이 하나씩 영글어갔다. 글에 대한 훈련 되쌓고 연마 거듭한 수련기, 긴 습작 시절이 있었기에 그 집에서 문단 데뷔를 할 수 있었고 수필집 서너 권도 상재하였다. 유 소년기를 지나 청년기를 그 집에서 보낸 남매는 이제 각기 전문직을 가진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큰 축복, 감사할 일은 온 가족에게 허락된 건강이다.

 

앞질러 예단할 수 없는 미래이기에 만일, 이란 가정법을 써본다. 혹여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산다면 그 집 볕바른 베란다에 흔들의자 하나를 들여놓고 자주 바다를 바라보고 싶다.  -2007 미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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