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Aug 21. 2024

벌집처럼 들쑤셔진 송악산은 쓰라린 상처투성이

다음날 제주에 태풍이 올라온다고 했다.


그 바람에 구름 바삐 달음질치며 먼 데서 우렛소리 들려왔지만  해풍 시원스레 불어 제키기에 모슬포까지 갔다.


매번 산방산에서 하차해 사계해안 거쳐 가던 송악산을 이번에는 모슬포 하모리에서 역으로 들어갈 참이었다.


같은 서귀포 바닷가라도 유독 바람 거칠기로 소문나 몹쓸포라 불리기도 하는 모슬포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씨이지만 대기 불안정해 하늘 청청하다가 잿빛이 되는 둥 변덕을 부렸다.


해는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있으니 시원하게 부는 해풍 동반하고 걸어가는 맛도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러나 웬걸~


거침없이 몰아치는 강풍이 대정 들판을 휩쓸며 사정없이 흙먼지를 내 쪽으로 밀어붙였다.


마스크를 착용하니 숨까지  막혔다.


데스벨리 열사를 건너는 몰몬교도도 아니고 사막의 고행승도 아니면서 이 무슨 만용?


허걱대며 후회가 밀려들 즈음, 그럭저럭 송악산 초입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로변에 알뜨르 비행장/섯알오름 유적지 안내판이 나타났으며 환태평양공원 기념석에 이어 산이수동 포구에 닿았음을 알리는 입석이 기다렸다.


푸른 솔숲 송악산 자락 초지에는 미끈한 준마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해송 울창한 숲 둘레길로 올라갔다.

시멘트로 다져진 길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황톳길을 솔바람 맞으며 걷는 느낌이 좋좀 전의 고행마저 잊혀졌다.

어릴 적 외가의 기억을 소환해 내는, 솔잎이 깔린 소나무 숲길은 퍽도 유정스러웠다.

산자락에 접어들자마자 등록문화재 제317호인 '제주 송악산 외륜 일제 동굴진지' 안내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송악산 수직 해벽을 뚫고 견고하게 만든 동굴 진지는 수차 봐왔지만 산등성이에 파인 동굴진지는 말로만 들었지 첫 상면.

능선에 깔린 솔잎에 미끄러질세라 조심하며 가재걸음으로 내려가 동굴마다 들여다봤다.

물론 목책에 둘러쳐져 바짝 다가갈 수는 없었지만.

전시실의 오래된 두개골처럼 퀭하게 눈자위 푹 꺼진 새카만 공간은 음산했다.

일제가 송악산을 들쑤셔놓다시피 파헤쳐 가며 알뜨르 비행장과 격납고와 해안동굴 만든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산비알마저 헤작질 했을 줄이야.

하긴 당시 한반도 주둔 병력이 9만여 명인데  총병력의 거의 반수인 4만여라는 엄청난 병력이 제주도에 집중돼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오만 방위수단이 동원될 만도.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수립된 ‘결7호작전’에 따라 건설된 군사시설들은 그러나 패전을 하며 대부분 미완성 상태로 남겨졌다.

해서 가슴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게 하는 을씨년스러운 몰골로 남겨져, 한층 더 마음을 착잡하게 만드는 지도 모르겠다.




송악산 제1분화구 외륜 능선에 일본군이 구축한 동굴 형태의 진지인 濟州 松岳山 外輪 日帝 洞窟陣地.


송악산 외륜은 무슨 말?


이중 화산체인 송악산은 따라서 분화구가 둘, 큰 산줄기 둘레를 따라 파놓은 동굴이겠다.


화산 분화구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바깥쪽 산자락에 분포돼 있는, 일제가 구축한 동굴진지는 여러 개였다.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기지로 삼아 미군의 상륙전에 대비한 방어준비를 하였다.

즉, 송악산 외륜에 분포된 동굴 진지들은 전략 요충지인 알뜨르 비행장 일대를 경비하기 위한 군사 시설물에 속한다.

주변의 군사시설인 비행장, 탄약고, 격납고 등의 경비와 연안으로부터 적의 상륙을 대비하기 위해 구축한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땅굴은 군수 물자를 실은 트럭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크고 넓게 건설되었으며, 거미줄처럼 서로 이어지게 만들었다고.

지네 몸통같이 길게 판 동굴로, 출입구 형태는 지네 발을 닮았으며 확인된 입구는 22개.

일본군은 제주 지역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처럼 송악산 지하에 대규모 땅굴을 파고 지하 진지를 만들었다.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유적 중에서도 특히 충격적인 해안동굴기지는 특공기지로, 타미가제 특공보트를 엄폐하기 위한 격납시설이었다.

현재는 안전상의 이유로 동굴 안으로의 진입은 금지되어 있다.

오름 사면에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동굴진지라, 제주도 내에서도 출입구가 가장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송악산 진지다.

한반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 때 남겨진 유다른 군사기지인 이다.

맨손이다시피 노역에 몰려 이름 없이 스러져갔을 이 땅의 무고한 사람중 청소년들의 희생이 가슴 아리다.

젊은 장정들은 징용으로 끌려갔으므로 근로 봉사대란 이름하에 아이들을 강제동원해 땅굴을 팠다고 하니.  

안타까운 고난의 역사 현장을 지켜보면서 후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렇다.

다시는 결코 외세에 굴복해 나라를 빼앗기는 일 따위는 없어야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굳게 하게 될 줄로 믿는다.

이곳이야말로, 식민지 백성으로 핍박받으며 비참하게 살아야 했던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거듭하게 하는 산교육의 현장.

2005년, 정부는 제주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지정하였다.

다시는 비극적인 일들이 반복되지 않고 참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국가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으련.

하지만 지구촌 곳곳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전운 거둬지지 않고 있으니...

결국은 힘, 가벼이 얕잡히지 않도록 힘껏 국력을 키워 자체 방어에 만전을 기할 밖에는.

송악산 둘레길을 한바퀴 빙 돌다가 바다에 떠있는 잎새 같은 가파도와 마라도를 육안으로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둘레길 입구이자 끝머리에서 형제섬을 향해 입 벌린 격납고도 만났다.

그렇게 송악산 동굴진지를 드디어 답사하긴 했다지만 접근 불가인  장소도 여럿이라 전수 살펴볼 수는 없었다.


송악산 해안절벽 아래에는 천연 해식동굴 두 곳을 포함하여 15개의 인공 동굴이 뚫려있다는데.  


일본군은 제주 지역민을 강제 동원하여 송악산 지하에 대규모 굴을 파 지하 진지를 구축했다.


단단한 해벽을 뚫는 굴착 작업 와중에  폭발사고를 당해 숱한 지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붕괴 위험이 있어 동굴 안으로 진입이 금지돼 있어서 송악산 건너 바다에서만 바라볼 수가 있다.


이 굴들은 2차 대전 당시, 어뢰정을 숨겨 놓았던 동굴로 곧바로 바다와 이어진 굴이다.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대정읍 상모리 산이수동에 만든 국내 최대의 일제강점기 군사유적지다.


해상에서 진입해 오는 미군 상륙정을 잠수정이나 작은 목조 보트를 이용, 폭탄을 싣고 자살 공격하기 위해 만든 비밀기지다.


형태도 一 자형, H자형, ㄷ자형으로 가지를 친 동굴 요새를 파면서 얼마나 많은 제주민이 희생되었을지는 미루어 짐작이 간다.


유도로라고 추정되는 시설물은 간조시에만 형체 드러난다고 한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국가등록문화재 제313호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50년 이상 지난 것으로 보존과 활용 위한 조치가 특히 필요하여 등록한 문화재이다.  


그 외에도 송악산 여기저기 벌집처럼 뚫려있는 굴이 수십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전략 요충지인 비행장 일대를 경비하기 위한 시설물들로 태평양전쟁 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제주도를 저항 기지로 삼으려 했던 흔적들이다.


송악산 일제 동굴진지는 그만큼 어두운 우리 역사의 서글픈 그늘이다.


이 군사시설물을 만들기 위해 제주 사람들에게 일제는 인적 물적 수탈을 그악스럽게 해댔다.


일본만이 아니라도 식민지에 대해 자비로웠던 나라가 과연 있었던가 싶은 게, 나라 빼앗긴 우리 스스로도 깊이 각성할 일이다.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니었던,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했던 그 시절 유적들이 전쟁의 잔혹함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곳.


하여 부디, 한라에서 백두까지 이어지는 모든 길에 앞으로는 내내 평화의 훈풍만이 넘쳐나기를.

일제는 태평양 전쟁 이전인 1935년부터 알뜨르 비행장을 송악산 부근에 세웠다.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해서였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5년에는 비행장을 확장하면서 지하벙커와 고사포 진지 및 탄약고를 설치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악명 높은 가미카제 조종사들을 훈련한 곳도 이곳 지하벙커였고 1인 탑승 전투기 격납고도 여기에 두었다.


만일 일왕의 항복 선언이 늦어져 연합군이 제주까지 공격해 왔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아찔하다.


일제의 패망으로 우리나라는 광복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반 토막으로 나뉘고 말았다.


조선시대부터 관의 수탈과 압제에 시달렸고 일제의 만행이 곳곳에 상처를 남긴 것도 모자랐던가.


군정에 이은 남북 간의 이념 대립이 극심하던 틈바구니에서 벌어진 4.3 항쟁의 비극.


송악산 섯알오름 옆에 있는 동굴진지는 입구 크기가 제주도 내 동굴진지 중 가장 크며 전투사령부와 통신실, 연료 창고로 쓰였다.


섯알오름에 있는 학살 터는 4.3 때 모슬포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의 예비검속자 212명이 집단 학살 당한 장소이다.


후에 명예 회복이 되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일본군 탄약고로 사용했던 장소에서 몰죽음을 당해 한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몇 년 지나 유해를 발굴했다고 한다.


움푹 파인 웅덩이에는 물이 고여있었으며 폭파된 탄약고 잔해물이 을씨년스럽게 나뒹굴고 있었다.


지난번 방문한 적이 있으나 그땐 주변 분위기 너무 음산해 추모비 뒤쪽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번 단사엔 다크투어 코스인 그쪽은, 빗발 툭툭 떨어지며 울리는 뇌성 심상치 않아 아예 엄두가 나지 않았다.


# 알림: 송악산 둘레길 데크 보수공사로 올해 11월 30일까지 부분통제됩니다.


송악산 대신 ->  https://brunch.co.kr/@muryanghwa/1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