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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무량화
Aug 22. 2024
한국의 파브르, 나비에 홀린 석주명
토평동 이쪽 거리는 차를 타고 휑하니 지나긴 했지만 초행길이나 마찬가지다.
평소 볼일이 없어 한번도 들른 적이 없는 생판 낯선 거리였다.
서포터즈 점심 모임 장소를 찾고자 지도를 보며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토평동 사거리 남동쪽에는 금송화 맨드라미 페투니아 꽃밭이 조성돼 있었고 중앙 기단 위의 자그마한 흉상이 눈에 띄었다.
옳거니!
새로운 포스트 감이 레이더망에
걸렸군
.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 서둘러 여유도 충분하겠다, 얼씨구나 그 앞으로 다가섰다.
석주명 기념비가 세워진 소공원이었다.
커다란 나비 모형을 보자 아, 나비 학자인 석주명 그분!
헌데 왜 제주 이 자리에 그분 기리는 비가 세워졌지?
갑자기 호기심 만땅으로 충전되며 땡볕 아래 서서 폰 검색을 해본즉슨......
불광 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 하였다.
"남이 하지 않은 일을 10년 이상 하면 성공한다. 세월 속에 씨를 뿌려라. 그 씨가 쭉정이가 되지 않도록 정성껏 가꿔라."
평생을 나비 연구에 몰두했던 석주명이 남긴 말이다.
그가 학문에 매진하던 시기는 일제강점기 때다.
1908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명문 숭실고보에 입학한다.
그러나 동맹휴학 사태로 학교 문이 닫히자 송도고보로 전학 갔다.
신식 농업교육을 강조한 그 학교 교장은 미국에서 농학 공부를 마치고 부임한 윤치호.
그 영향으로 석주명은 일본 가고시마 농립 학교로 유학 가서 농생물학을 공부했다.
거기서 농작물과 관련 밀접한 응용곤충학을 배웠다.
가고시마 유학 때 처음 본 유채를 제주 생약연구실에서 근무할 당시 경제작물로 도입해 시험재배 거쳐 농가에 보급한 분도 그였다.
앞으로는 노란 유채꽃 출렁이는 봄마다 그를 자동으로 회상하게 되리라.
그즈음 에스페란토에 심취, 훗날 에스페란토 실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
즉 세계 학자들과 교류하고 나아가 자신의 연구결과와 업적을 국제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수단이 에스페란토였다.
일찍이 석주명의 학자적 재능을 알아본 일본 곤충학회 회장 오카지마 간자 교수는 그를 나비의 길로 인도한 멘토.
그에게 아직 미개척 분야인 조선의 자생 나비에 대해 조선인 학자로서 애정을 갖고 깊이 파고들 것을 권했다.
힘없는 식민지 백성인 그는 이를 위해 일본에서 더 이상의 전문교육은 포기하고 귀국해 모교 박물 교사가 된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나비 연구에 들어가나 당시 실정은 나비에 관해 지침이 될 참고 문헌이 전무한 상황.
그는 우선 나비 채집부터 시작, 틈만 나면 산야로 뛰어다니며 나비를 쫓아다녔다.
십 년 후 그가 송도고보를 떠날 때 연구실에 보관 중인 나비표본은 이미 60만 마리였다.
이를 유지할 여건이 안 되는 실정이라 산하 여기저기 헤매며 채집한 애정 깃든 나비들을 그는 소각시켜야 했다.
뒷날 그렇게 산화한 나비를 위한 위령제를 그는 지내주기도 하였다.
여기엔 1933년 조선박물학회지에 은점표범나비의 세 가지 이름이 동종 이명임을 규명해 올렸던 나비도 포함됐다.
삼 년 후에 그는 배추흰나비의 개체변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나비 학자로 사는 동안 75만 개체를 표본 삼아 잘못 알려진 아종과 변종, 동종 이명을 추려냈다.
1938년 나비 학자의 최고 경지에 오른 그에게 한국 나비 총목록을 집필해 달라는 영국 왕립 아시아 학회의 의뢰가 왔다.
일제강점기에 한국학자가 펴낸 영문 과학서인 한국산 나비의 총목록이 완성돼 세계 각국 박물관으로 나갔다는 건 굉장한 일.
이로써 석주명은 국제적으로 삼십 명의 학자에게만 문호가 개방된 '만국 인시류(나비와 나방 총칭) 학회' 회원으로 선출됐다.
남들이 관심 없는 분야를 10년 이상 꾸준히 하면 세계 제일이 될 수 있다,를 몸소 보여준 그는 민족의 선각자이자 스승일시 분명하다.
사거리 기념비로부터 백여 미터 떨어진 도로 건너편에 나비생태관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아직 간판도 안 걸린 건물이 두 동 뻘쭘하게 엇갈려 서 있었다.
주 건물의 중앙은 영화관인 듯 앞에 매달 영화 상영이 있다는 포스터의 '탑건'이 반가웠다.
전시실 입구 찾기도 어리벙벙했으나 전시실로 여겨지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첫눈에 띈 것은 나비 표본 액자와 꽃과 나비가 어우러진 화첩도(花蝶圖) 그림이 그려진 시화 병풍 인테리어였다.
석주명이 소장하고 있던 남계우의 나비 그림 10폭 병풍에 위당 정인보 선생이 시를 써 준 일호화접도행(一濠花蝶圖行)이란 작품.
일호(一濠)는 조선 후기 문인 화가인 남계우의 호로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의 손자다.
석주명의 유일한 혈육인 따님 석윤희 교수가 미국에서 보관해 왔던 귀한 병풍이라고 한다.
그 외엔 이렇다 할 석주명과 연관된 나비 관련 자료나 시설물은 별로 없는 거 같았다.
생태관이라기보다는 여러 종류의 책들이 비치돼 있어 오히려 마을 도서관을 겸한 주민문화공간 같았다.
물론 석주명에 대해 쓰인 아동 도서는 많은 편이긴 했지만.
개관한 지 얼마 안 된 까닭에 아직 시설물이며 전시실이 자리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내부 정리가 완벽히 되기도 전, 유례없는 올여름 혹서라 더위 쉼터로 주민들에게 임시 개방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시설물 안내 카탈로그나 팸플릿 하다못해 리플릿조차 준비돼 있질 않아서 홍보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다.
다만 학부모 아카데미 교실을 열어 책 읽기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내용만 사무장을 통해 전달받았다.
공공시설물 하나를 건립하려면 건축 계획 심의에서 승인까지의 절차뿐인가.
건축 허가 및 발주 그리고 준공 감리를 유관기관으로부터 받기가 까다롭기 그지없는데 거기다 용도변경까지 한 기념관.
아마도 나비 기념관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공간 개념에 역점을 두었던 듯.
그도 미상불 나쁜 선택은 아니나 사실 유명무실한 지역 문화센터들을 하도 많이 접해본 터라 혈세 누수나 없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국립 과학박물관 동물학 연구부장, 수원 농사시험장 병리곤충학부장을 역임하는 등 뛰어난 박물학자였던 석주명.
생명과학분야 대한민국 과학기술분야 유공자인 그가 쌓은 높은 업적에 따라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받았다.
2년간 머무는 동안, 제주도 방언을 모으고 고문헌을 비롯 총서를 집필해 제주도 심층 연구에 앞장서 제주학의 토대를 구축한 그였다.
나비박사 석주명 기념공원이 생약 연구소 인근에 들어서게 된 까닭은?
1943년부터 이태 동안 경성제국대학 부설 생약연구소 제주도 시험장에서 석주명 소장이 근무하여서 이리라.
하여 돈내코에서 내려오는 산책로 이름이 석주명나비길로 불리게 되었고.
그때 제주의 독특한 자연과 문화에 매료된 그는 제주 방언, 제주 언어와 지리 등을 조사해 여섯 권의 제주도총서를 발간하였다.
한국의 나비를 집대성한 그는 이같이 자연과학을 인문학과도 접목시켜 학문적 지경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런가, 한국동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비명횡사를 당했다.
그의 나이 41세, 한창때 일이다.
우리나라의 생물 가운데 나비만을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석주명은 우리나라 토종 나비를 가장 잘 아는 세계적인 학자였다.
해방을 맞은 뒤 국내 대부분의 나비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다.
일본어로 불리던 한국산 나비 248종의 이름을 우리말로 고치거나 새로 지어 1947년 조선생물학회에서 통과시켰다.
굴뚝 쑤신 듯 새카매서 굴뚝나비, 까불대며 날아다녀서 팔랑나비, 반투명한 날개를 가진 모시나비, 지옥처럼 험한 고산에 살아서 지옥나비.
이런 유의 이름 모두는 그가 작명했다.
정밀한 관찰과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 아름다운 우리말 이름은 그렇게 지어졌으며, 현재 한국 나비 이름의 2/3 이상은 그가 지은 이름이다.
나비 사랑뿐만 이랴.
누구라도 자신이 흥미를 느끼면서 가치 있는 일에 죽어라 매달려 볼 필요가 있다는 걸 후대들에게 은연중 가르쳐 준 그다.
우직스레 한 우물만 파 들어가면 언젠가는 자신이 추구했던 사계의 일인자가 돼 있게 마련.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골라서 어려움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한 분야에 온 힘 기울여 집중적으로 매진하노라면 반드시 뭔가를 이룬다는 것.
그의 여동생 석주선도 한 길만을 고집한 인물로 한국의 전통의상을 비롯해 장신구 연구의 선구자로 단국대 교수를 지냈다.
비단 그들 남매의 경우에만 국한된 일이랴.
물론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예외도 있긴 하다
보통 사람을 대단한 학자들과 같은 반열에 세우는 자체가 혹여 어불성설?
특정인만이 아니라도 누구 건, 오랫동안 한 가지 일에 몰두할 경우, 언젠가는 사계(斯界)의 권위자가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하다못해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 옛말이 왜 생겨났겠는가.
특정 분야의 어떤 일이건 꾸준하게 시간을 투자하면 틀림없이 성취에 이르게 됨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한다.
타고난 재질이 없다고 여긴 비전문인도, 글이고 그림이고 악기고 끊임없이 연마해 보라.
다 선수요 프로가 되는 세상이다.
며칠 전 외사촌이 자신의 시누이가 만든 유튜브를 보내왔다.
널리 알려진 유명 음식 연구가는 아닐지라도 외사촌의 시누이는 나름, 삼십 년 넘게 투신해 온 자기 일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룬 사람이다.
주부로서 항시 음식 만드는 일을 해오다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인 요리강습 교실을 전문으로 개설한 그녀다.
'건강한 영양 식단' 대면 수업이 어려워진 시국이 되자 유튜브로 전환, 해독 식탁이라는 차별화된 컨셉으로 발 빠르게 대처했다.
현대인이라면 대다수가 갖고 있는 숙제인 몸 안에 축적된 독소를 배출시키는 기적의 레시피를 그녀는 매주 선보인다.
오랜 세월과 경륜이라는 노하우가 축적된 그녀는 지긋한 나이에 해독 식탁 크리에이터로 현재 맹활약 중이다.
모든 이에게는 그런 잠재력의 씨앗이 숨겨져 있으며 내재되어 있던 씨앗은 언제건 때가 차면 발아하게 된다.
점심 약속 시간 임박해서야 전시실을 나섰다.
걸으며 든 생각 하나는,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누리진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비는 꽃과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그에게 끝내 허락되지 않은 화목한 가정, 꽃이어야 할 여자는 그의 생에 부재했다.
첫 아내와 사별한 뒤 두 번째 맞은 아내는 키가 크고 활달한 여성으로 그녀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오로지 가정 지키고자 자신을 버리고 헌신하는 아내, 그 시대에도 무조건 참고 순종하는 그런 아내가 아닌 신여성이었던 부인이었나 보다.
아내가 병 중이라도 그는 채집망을 들고 산야로 나비만 쫓아다녔고 밤낮없이 연구에만 빠져있는 남편은 외골수 샌님 같았으니.
나비에 홀려 허구한 날 밖으로 도는 새카만 얼굴에 왜소했던 남편에 비해 아내는 키도, 목소리도 컸다니 자연 부부 불화가 끊이질 않았다.
결국 이혼을 하게 됐고 아내는 딸을 데리고 머나먼 미국으로 가버렸지만, 외려 그는 마음 놓고 공부하기 편해 좋다고 하였다는데.
부부화락을 기대하기 어려운 조건들, 하기야 그렇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는지도 모른다.
세상 이치는 참으로 묘하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두루 다 갖춘 사람은 본 적이 없다.
한 면이 넘친다 싶으면 다른 한 편이 부실하다.
거의가 게서 거기, 사람 사는 거 오십 보 백보.
그래서 공평무사한 세상일까.
인간사 주관하시는 신은 역시 공정하신 분이다.
이 포스팅은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이란 책자와 생애를 다룬 영상물을 참고한 내용들이다.
르네상스 의미처럼 그가 연 학예부흥 나아가 문화 부흥 운동 다시금 꽃 피어나 명실상부한 세계 탑의 한국 학자와 예술인들 행렬 이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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