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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1. 2024

체로키 피플의 한

                                 https://youtu.be/QZ0gobSHgIs?si=u8pRhh5Up6kOWZeP


뉴저지에서 우리가 다니던 성당 맞은편에는 벽돌 건물의 체로키 하이스쿨이 있었다. 웬일로 별나게 교명에 인디언 부족 이름을 다 붙였네, 하며 건너다보던 학교다. 하긴 현재의 지명들이 원래는 켄터키/내일의 땅, 일리노이즈/잘난 사람들, 다코다/모두 연결된 사람, 나이아가라/천둥처럼 구르는 물, 미시간/큰 호수, 요세미티/핏발 선 곰, 앨라배마/이곳에서 우리는 쉴 것이다, 아이오와/아름다운 땅이란 인디언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던가, ‘늑대와 함께 춤을’이란 이름처럼 어떤 사물이나 자연의 특징 또는 성격상의 장단점에 따른 별명이 붙여지면 그것이 이름이 되는 것이 인디언 식이다.

 
체로키 부족은 테네시 주와 죠지아, 캐롤라이나 주에 살던 부족이다. 다양한 석기를 사용했으며 옥수수, 콩, 호박을 가꾸는 한편 사냥으로 고기와 옷을 취해서 살았다. 체로키는 백인들이 말하는`문명화된 인디언 부족`중 하나로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백인 문화에 급속히 동화된다. 1827년 미국 정부를 모델로 하여 체로키국을 세우고 입법 의원과 대표를 선출해 헌법을 제정한다. 그리고 백인식 농법과 건축술 등을 수용하였을 뿐 아니라 최초의 인디언 신문인 <체로키 피닉스>를 발간하기도 했다. 명실공히 체로키 족은 북미대륙의 문명인이었다.


1838년 애팔래치아 일대에 골드러시 열풍이 불자 대대로 거기서 살던 체로키 인디언들은 앤드루 잭슨의 원주민 이주정책에 따라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강제로 내몰린다. 혹한 속의 도보행군 과정에서 굶주림과 추위로 4천 명이 넘게 희생되면서 생겨난 눈물의 길(Trail of Tears). 그를 주제로 한 체로키 피플이란 노랫말이 유행을 타며 체로키란 이름의 인디언 부족이 있었다는 건 알았다. 그뿐, 그들이 고유문자를 가진 문화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족이라는 건 한참뒤에 알았다. 유럽인들에 우호적이었고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활발히 교류를 나누는 한편 대학도 설립한 체로키족의 운명도 그러나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미국 의회에서는 '체로키족 전원이 미시시피 서쪽 새 보금자리로 완전히 이주했다.'고 발표했다.


베르베르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조화 속에서 공존하던 세상이 바로 인디언 사회였다고 역설한다. 인디언들은 스스로를 자연의 정복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살았다. 일례로 인디언들은 사냥감이 줄어들면 곧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생태계가 황폐해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적당한 때에 자연을 자연의 품으로 되돌려주는 미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권력 관계도 조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절대 권력을 휘두를 것 같은 추장도 부족 전체의 합의와 신임에 의해서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본디부터 아메리카 땅에서 대대로 살아오던 인디언들은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땅으로 들어온 백인들은 황금을 위해 땅을 차지해야 했다. 그들에게 죄가 있다면 백인들이 몹시 탐내는 것들을 갖고 있었다는 죄뿐. 백인들은 인디언을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금전으로 매수하고 협박으로 도장을 찍게 하고 총칼로 수많은 부족을 짓밟으면서 땅을 빼앗은 강제 점유의 역사를 써 내려갔다. 유럽인의 탐욕으로 인디언들은 무기도 부족하고 중과부적, 결국 살던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눈물의 길을 걸어야 했던 체로키 부족의 비극은 인디언들이 어떻게 땅을 잃고 내몰렸는지 그 과정을 생생히 보여 주는 모델이기도 하다.


인디언 레저베이션을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보호 조치가 아니라 억류와 인디언 분리 정책이다. 그에 따라 오래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은 백인에 의해 유배지로 밀려난 셈이다. 백인들은 광활한 평원과 삼림을 빼앗고 이들을 늪지대나 풀이 자라지 않는 사막의 불모지에 강제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것이 레저베이션으로 '법 효력 정지지구'인 까닭에 역설적이게도 도박과 마약이 횡행한다. 그러나 점차 교육이나 취업목적으로 3분의 2 이상이 인디언 보호구역을 떠났다는데 그만큼 인디언 구역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2010년 5월 20일 미국 정부는 '인디언에 대한 사과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어서 과거 원주민에게 가했던 폭력행위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배상을 하였다. 그래도 원죄의식은 느끼고 과거사 청산을 취한 제스처를 쓰니 그나마 인간적이다. 일본 같은 파렴치족도 있는데 반해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펴며 권익향상과 복지증진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 그 이전 인디언들은 1924년까지 미국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1948년에야 비로소 참정권을 얻었다. 인디언에게 미국인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일련의 정책 기저에는 인디언을 흡수, 동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실제로 이때부터 인디언사회의 문화해체는 가속화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원주민의 권리회복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났던 것은 1970년대다. 샌프란시스코에 아메리카 원주민 역사학회가 발족되며 점진적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낮은 교육 수준으로 대학 진학률이 10% 미만이며 높은 실업룰 속에서 의료혜택도 제대로 못 받으며 빈곤하게 살아간다. 조작된 인디언 역사에 따른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며 미래에 대한 불안을 안고 정체성마저 상실해 가는 그들.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알코올 의존중 환자에 마약 중독자되어 자조적으로 살아가며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늘어간다. 그들의 평균 수명이 50세도 채 못 되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까. 체로키 피플, 아니 인디언들의 피눈물은 여전하기만 하다.


그럴수록 인디언 후예들은 각성하여 선대가 남긴 풍부한 유산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에 매진해야 하련만. 피지배자되어 모국어마저 빼앗기고 무력하게 타인종들과 섞여 혼혈로 살아야 하는 그들이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이되 자신의 뿌리만은 잊지 말아야 하리라. 무엇보다 특히 교육의 중요성을 자각하여 어서 속히 몽매함에서 눈을 뜨는 일이 급선무겠다. 그리하여 다민족 다문화가 공존하는 융합의 시대에 그들이 잉카시대처럼 화려하게 부활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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