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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5. 2024

무릎 꿇기


수차 다짐을 했다. 속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퉁명스레 내뱉기도 했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바보같이 살지 않겠노라고.

묵묵히 순종하며 인내하며 희생만 하는 엄마가 답답하고 짜증스러웠다.

속도 없느냐고, 억울하지도 않으냐고 열을 내며 씩씩거렸다.

엄마는 그저 엷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또는 훗날 너도 알게 돼, 하는 표정으로. 잔잔한 그 미소에 더 화가 치밀었다.​

 

무릎 꿇는다는 건 패자의 자세만이 아님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엄만 최후의 승자였음을. 이승살이가 찰나라면 그 너머는 영원의 세계.

삶의 수고 끝내고 본향으로 돌아 간 엄마는 하늘 문 앞에서 틀림없이 영원한 승자가 되었을 것이므로.

진작 예수님 이름은 몰랐을지라도 그분 누누이 말씀하신 그대로를 실천해 온 일생.

“먼 여정에 가지고 갈 것이라고는 남에게 베푼 것뿐인 이 행복합니다.”라는 시처럼.

 ​

층층시하 시집살이 적부터 익어진 습성일까. 마치 풀꽃처럼 항상 무릎 꿇고 조그맣게 앉던 엄마다.

시부모에게 남편에게 심지어 자식에게조차 엄마는 자신을 대령시키듯 낮추고는 무조건 그 뜻을 받들었다.

오롯한 섬김의 자세였다. 나를 내세우거나 주장한 적 없이 늘 미미한 풀꽃이던 엄마.

어느 장소에서든 뒷전으로 숨듯이 물러서, 있는 듯 없는 듯한 그림자였던 엄마.

상에서조차 마련된 웃어른 자리 손사래 치며 고사하고는 귀퉁이에 앉는 엄마가 못마땅할 적도 있었다.

당연한 대접 마다한다고 눈치를 줘도 엄마가 앉는 자리는 늘 맨 끄트머리 거나 가장자리일 뿐이었다.

 

엄마의 희생을 양식 삼아 자라온 나. 엄마라는 밀알이 썩지 않았더라면 나는 과연?

염치없고 면목없어서가 아니라 젊어서는 그런 엄마가 정말이지 너무 속상해서 화통이 터졌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없었던 엄마. 나를 비워버리고 자기를 죽인 엄마였다.

한번도 내 주장이란 걸 해본 적이 없는 엄마.

나 자신은 제쳐두고 순전히 남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포기한 채 살아온 한생이었다.

제1인칭 단수대명사인 '나' 이외의 모두 다, 자기 자신이 아닌 일체는 곧 남으로 엄연한 타인이 아닌가.​

 

꼿꼿이 들고일어나는 자아로 인한 충돌을 일상에서 수없이 겪고 사는 우리.

본능인 자기애를 뛰어넘어 자아를 접어버린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아셨기에

그리스도는 이웃사랑을 첫째가는 계명으로 꼽으셨을 터다.

이웃은 자신 외의 모든 사람, 가까이는 가족이고 넓게는 온 인류다.

나를 버리고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약한 사람들과 따뜻한 사랑을 나눈 마더 레사.

묵묵히 이웃사랑을 실천한 그녀가 거룩한 것처럼 나를 죽이고 가족 위해 희생한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

숭고한 그 이름 어머니, 인간가치를 키워주고 인격형성을 도와주는 밑거름으로, 가정을 지켜온 대다수의 어머니는 그래서 성자다.

 

한량인 아버지는 평생 첩실을 끼고 살았다.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는 시앗을 서넛 넘게 보면서도 엄마는 시종 참고 또 참았다.

내 기억엔 그로 연유해서 집안 시끄러이 불화 일어난 일도 없었다.

속 깊은 한이야 왜 없었을까만은 원망이나 탓을 드러나게 한 적이 없는 엄마.

평화를 깰법한 분노와 증오였음에도 엄마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렸던 걸까.

특별한 종교에 의지한 적이 없는 엄마다.


심지어 점집을 찾거나 푸닥거리 같은 걸 가까이한 적도 없는 엄마.

크리스천도 아닌 엄마는 예수의 희생적 사랑, 마리아의 기꺼운 순명을  이해하셨던 것처럼 주어진 십자가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이사야서에 쓰인 그대로 '털을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아무 말 없이.

    

그리하여 용서의 은총이 내려진 것일까. 모진 상처만을 준 아버지도 연민으로 품어 안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시퍼러이 날이 선채 용납이 되지 않았다. 화해할 수도 없었다.

시비선악으로 판단컨대 분명 흑은 흑이요 백은 백. 그럼에도 오히려 선 위에 군림하는 악이라니,

터무니없는 불평등에 맞서 분연히 반기를 들곤 했다.

이처럼 나의 교만은 운명에 승복하고 무릎 꿇는 엄마가 패자로 보였다.

장애를 뛰어넘지도 못하고 당차게 거부하지도 못하는 엄마가 무력해 보이기까지 했다.

죽어야 사는 이치를 알기 이전의 일이다.

 

지금사 엄마가 바보처럼 산 게 아님을 깨닫는다. 아니 진짜 바보로 살았기에 성공한 생이다.

엄마는 번번이 피해자가 되어 내출혈의 통고를 겪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긴 승리자.

생을 마무리할 무렵 늦게나마 엄마는 영세를 받고 하느님을 영접했다.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믿음을 순결스러이 받아들인 것이다.

신앙을 갖게 된 동기를 사람들에게 물으면 대략 이렇게 답한다.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올바른 삶을 위해서, 내세의 영원한 삶을 위해서,라고.

엄마가 옳았다. 굽히는 것은 지는 것이라 여겨 완강하게 버텨온 내 무릎, 내 자아.

나도 이제 더 자주 무릎 꿇어야겠다.   


-2004​, 엄마 귀천하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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