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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5. 2024

금강선원 후원

노련한 솜씨꾼은 글 첫머리 시작부터가 다르다.

글의 서두, 첫 문장을 풀어나가는 능력을 보면 글의 수준이 대강은 가늠된다.

성공한 글에서는 눈길 주자마자 시선을 긴장시키는 그 무엇,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그 무엇, 흡인력 있게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

작문 심사에서 첫머리부터 시원찮으면 보나 마나 한 글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별볼일없는 서두로 인해 뭉뚱그려 자칫 등외품으로 취급될 우려도 있게 된다.

속에 아무리 알짜배기가 담겨있을지라도 일단은 채점자의 관심을 끌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소설가 계용묵은 書頭一行 때문에 살이 깎인다, 고 했을까.

무엇이나 그만큼 중요한 게 처음 앞머리라 여겨진다.

첫인상에 의해 대인관계의 성패가 갈리기도 하듯 본질이나 내용과는 관계없이 가치결정이 내려지기도 하니까.



책을 묶을 때면 통상 제일 잘된 글을 골라 맨 앞쪽에 넣었다.

기대감이나 호감을 느끼게 할 만한 대표작 격의 글부터 먼저 문전에 내세우는 것이다.

해서 대체로 출발은 요란번쩍 그럴싸하나 갈수록 맥이 빠져 용두사미가 되고 만다.

포장만 화려하게 하고 알맹이가 빈약하면 내실 없는 속 빈 강정 소리를 듣게 됨에도 번번이 나는 그 작당이었다.

어떻게든 괜찮게 보여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마음이 급해 줄줄이 앞자락에 번드레한 전을 차려두고 호들갑을 떨다가 종내 뒷감당 못해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만다.

권투선수는 뒷심이 받쳐줘야 마지막 승자가 될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나는 첫판에 괜한 만용을 부려 힘을 죄다 소진시킨 뒤 허망히 무너지는 권투선수 꼴이 아닌가.



한국의 이름난 명가를 소개한 영상을 만난 적이 있다.

첫눈에는 초라한 듯 보였으나 볼수록 의연한 기품이 풍겨 나는 한옥이었다.

규모도 소박하니 조촐하고 품새 역시 간결하고 담담한 집.

어느 구석 하나 호사로울 것도, 조금도 특별스럴 것도 없는 한옥이었다.

단지 자연과 서로 조응하며 담소 나누는 듯 푸근한 데다 정감어린 운치가 느껴지는 게 새록새록 친근감이 들었다.

마음을 은근히 사로잡는 그 무엇의 실체는 바로 뒤뜰 후원 정자 옆의 작은 연못에 핀 수련 한 송이였다.

감춰진 보석처럼 빛을 발하는 수련이 있어 그 집은 그리 향기로웠다,

가슴속 현을 울리듯 오롯한 그 감동은 실로 그윽하고 그윽했다.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 것은 LA 근처 금강선원으로 인해서였다.



LA에서 두 시간 넘어 걸리는 팜스프링 배닝 소재 금강선원을 찾았다.

묵언정진하며 미국포교에 앞장선 청화 큰스님이 발원한 사찰이라 한다.  

강렬한 햇살 내리 꽂히는 메마른 민둥산 휘휘 휘감아 돈 다음 잠시 굽이틀어 내려서니 황량한 산자락에 우뚝 일주문이 서있었다.

노송 둘러선 숲길에서나 만나는 일주문에 익숙한 터라 그 풍경은 마치 接寫한 사진처럼 기묘하고도 낯이 설었다.

고즈넉한 산사의 멋이야 애시당초 여기 몫은 아닐지라도 왠지 어설프고 서먹서먹하기만 하였다.

이름 모를 붉은 꽃송이를 탐하는 벌새 나래짓 소리조차 들릴듯한 적요 속.

어디선가 뎅뎅 풍경소리가 섞여 들었다.

참선한다기보다 고행하듯 땡볕 아래 좌정한 법당 벽 여기저기를 기어 다니던 도마뱀이
느닷없는 방문객에 놀라 잽싸게 숨어버렸다.

인기척이 반가운 듯 누렁이인지 진도인지가 발치 가까이 다가와 맴돌며 킁킁대더니 싱겁게 물러났다.

한적하기 그지없는 미국 안의 孤島 같은 금강선원.



누렁이가 사라진 그 너머로 위엄 어린 용자로 솟아있는 종루가 보였다,

그쪽으로는 신기하게도 제법 우거진 숲이 푸르렀다.

입안 깔깔하도록 모래먼지 들쓰고 올라온지라 녹빛 싱그런 기운에 절로 이끌렸다.

숲그늘에는 수수한 대웅전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별장 같은 통나무로 만든 요사채도 있었다.

그뿐 아니다. 물기 메마른 산중에 의외로 안마당만 한 연당이 펼쳐졌고 백련 홍련 소복 피어 송이송이 고왔다.

파삭하니 건조하기만 한 이 산기슭에 어디 푸른 수원이 깃들어 있었던가.

연꽃도 연꽃이지만 연못에 찰랑대는 물이 오아시스처럼 반가웠다.

속세와 절연하고 홀로 사는 수행승처럼 지그시 돌아앉아 있는 품이 무엇보다 맘에 들었다.

맨 앞전에다 내세워 자랑하고 싶을 만큼 근사한 연당이건만 이렇듯 슬몃 감춰져 있다가 만나니 그 가치가 한층 배가되는 느낌이었다.

후원에 숨어있으므로 오히려 더 아름다이 다가와 안기는 연당.



누군가가 그랬다.

외국에 나와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민자들은 선구자라고.

대한민국의 한정된 국토를 넓히는 일을 하고 있는 애국자들이라고.

민들레 씨앗처럼 낯선 곳에 뿌리내려 한치한치 자기 삶의 터전을 넓혀나가는 그만큼 우리나라의 영토를 확장시키는 일이다.

처음 여기 절터를 닦아 주추 세운 분 역시 개척자이자 애국자.

불모지 같은 삭막한 땅을 삽질하여 한국불교의 영역을 확대시킨 분 아닌가.

그만으로도 장한 일이다.


창건유래를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거기 연당을 일구고는 모국의 어느 절에선가 가져왔을 연뿌리를 심어 가꾼 손길의 정성에 절로 두 손이 모아졌다.

숙세의 깊은 인연이 있어야만 닿을 수 있는 만남처럼 후원 깊숙이 은수자이듯 숨어 피어있던 연꽃.

그렇구나.

드러나는 첫머리보다 뒤편을 더 공들여 가꿔가는 것이 소중하구나.

항상 그날의 스타는 맨 뒤에 등장해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하는 것을.... 2015          

18500 Diamond Zen Rd Banning , CA 9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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