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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17. 2024

솔향 품은 그대

밤, 천공에 수놓아진 찬란한 별들. 무한대인 별의 바다다. 은하계라는 우주공간 속 하고많은 반짝임 가운데 하나일 따름인 지구, 아! 그러나 아름다운 별.

 
셈하기 벅차도록 까마득 먼 광음 저편에서 불덩이로 태어난 지구의 몸이 서서히 식어갔다. 그러고도 다시 겹겹의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 인류의 조상이 나타나기도 전인 7 천만년 전의 일이었다. 금생(今生)의 만남을 예비하고자 지심 깊이 묻힌 그대는 빙하기를 거치고 때로는 들끓는 화산활동과 격렬한 지각변동에 뒤채이면서 공기와 섞여 굳은 광석으로 변하였다.

 
아끼는 펜던트가 하나 있다. 장신구를 별로 탐하지 않는 편이나 긴 체인에 매달린 앰버라는 이름의 호박 목걸이를 즐겨 자주 착용한다. 정장 차림 외에는 어디에나 자연스레 어울리는 목걸이다. 부드러운 봉밀(蜂蜜) 빛에 비정형의 자유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크기와는 달리 무게는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물에도 뜰 정도로 그 자체의 특성이 아주 가벼워서이다. 소나무의 수지(樹脂)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하여 문지르면 솔잎 같은 향을 풀어낸다. 산뜻하니 화하게 번지는 싱그런 내음을 음미하고자 나는 자주 그대 볼을 어루만진다. 그대는 내게 유순히 전신을 맡긴 채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아득한 옛적인 지질시대, 나는 소나무 곁의 은행나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솔숲을 지나다 우연히 교감 나눈 한 점 구름이거나 바람이었을지도 모를 일. 우린 잠깐 눈길 스침만으로도 끊을 수 없는 내밀한 연을 맺었던가. 그러한 우리가 안타깝게도 이제야 비로소 만났다. 늦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해후는 정녕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무의미하게 스쳐버린 관계로 엇갈리지 않았음에 감사드리기도 한다. 累生을 기다려 온 만남이어서 일까, 첫눈에 금방 나 그대를 알아보았다. 오랜 나날 꿈꾸며 그리며 애타게 기다려 온 우리의 만남. 그건 하늘의 섭리였다. 하여 조금치의 오차도 없는 우주선의 도킹만큼이나 정밀한 영혼의 합일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이리.

 
잠재의식 저 아래 짬에서 그대 매끄러운 감촉, 알맞은 온기, 독특한 살내음을 얼마나 간절히 그렸던가. 솔 향 품은 그대. 문대면 손끝에서 송진 내가 번진다. 쌉쌀하니 상긋한 솔의 향기다. 처음엔 식물이었다가 어느 날 눈물이듯 흘러내린 나무의 진액이 땅에 묻혀 광물로 거듭난 그대는 발트해 연안에 자리했던 소나무의 정령이다. 줄기의 상처에서 나온 맑고도 끈끈한 송진, 위스키 빛 투명한 수지엔 작디작은 곤충들이 휩쓸려 몸을 섞기도 하고 더러는 하늘대는 깃털이나 더듬이 등 신체 일부를 떨구기도 하였다. 주로 개미나 날벌레 같은 아주 작은 생명체들의 것이다. 엉겁결에 하나로 응고된 채 땅속 어둠에 들어 지열로 몸 굳혀서 덩이진 광석이 되기까지의 길고 긴 인고의 세월을 새삼 반추하지는 않겠다. 식물성이면서 광물성이자 동물성도 포함한 복합체, 그렇듯 기묘한 그대가 아낌 받는 보석으로 환생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필히 만나야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북구의 밀밀한 삼림지대다. 소나무에서 방울져 내린 송진이 지심 깊이 매몰되어 석화(石化), 먼 훗날 퇴적암 층에서 발견되곤 하는 앰버라는 암석은 다른 식물이나 동물의 잔해처럼 화석 연료되어 사라지지 않고 귀한 존재로 대견스레 부활을 하였다. 그리하여 우주 안에 단 하나 점지된 그대의 짝, 반쪽으로 기다려 온 나의 심장이 맥박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하여 그대가 기다려온 시간의 질량이야 영겁이듯 얼마나 길고도 무거웠으랴. 그러나 우리 이젠 더 이상 목 늘이지 않고 평온한 안식에 들어도 좋으리라.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기다림의 끝자락에 결국은 우리 만나 누군가의 시처럼 '쓸쓸한 골목길에 한 등 따스한 불을 밝히는 일'을 함께 일구어 나가고 있으므로.

 
그대를 맞고자 미리 여기 닿아 기다려온 나. 무궁무진 끝없을 것만 같던 그 기다림, 은근히 가슴 녹아내리는 시간이었다. 그대 또한 첩첩 침묵 사이를 누비며 줄곧 내게로 내달아 여기 이르렀으니 시공 뛰어넘은 우리 사이 어찌 예사로운 관계라 할 수 있으랴. 장장 7 천만년이 걸려 이루어진 만남이다. 이생에서는 천 년조차 아니 백 년마저도 길고 긴 일월, 그러나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지극히 짧은 찰나이다. 지구의 무량한 역사와 견주어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불교의 시간개념에 비추면 그 차이란 별 것도 아니다. 수유(須臾)가 영원일 수 있고 무량겁이 한순간일 수도 있음이니.

 
베이지 색 톤의 상의에 특히 조화로운 펜던트. 두 손 포갠 가슴 한가운데서 다소곳 그대는 잠든 듯하다. 손바닥에 배인 상긋한 내음을 하마 놓칠세라 나직이 고개 숙여 그 향기 어루만지다 다시금 우러러본 밤하늘. 아아, 역시 그대와 인연 닿게 된 이 세상이기에 나의 별 여행은 행복하고도 아름다웠노라 말할 수 있겠다. 청남빛 하늘 가득한 별, 얼음물에 헹군 듯 제각기 초롱한 밤이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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