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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22. 2024

걸음 멈추기 전에 미리 준비할 일

나이 들수록 웰빙 못지않게 중요성이 절절하게 대두되는 웰다잉이다.

결국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한계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언젠가는 모든 걸 멈춰야 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오고야 만다는 사실.

한 생명의 종말이 가까워 오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책임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마는 시점도 그렇게 오게 된다.

삶은 불공평한 면도 있지만 죽음만큼은 공평무사.


생한 즉 멸하는 원칙에서 너나없이 누구라도 제외되지 않는다.

고로 건강해서 바른 사리판단을 할 수 있을 때 미리, 혹시 있을지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스스로 적절한 대처를 해두자는 얘기다.

아툴 가완디(Atul Gawande)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란 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단순 명료했다.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에 매달리기보다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숙고해 보자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하는 데 집착하기 이전,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돌아보는 방식으로의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지키며 인간답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한계를 인정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마무리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노쇠해지거나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죽어 갈 때 취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는 걸까? 저자는 있다고 말한다.

죽음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 아닐지라도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아름다울 수도 있듯, 곧 인간답게 죽어 갈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현재 하버드 의과대학과 보건대학 교수이며 보스턴 브리검 여성병원 외과의인 저자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 ‘삶에는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로써, 나완 무관한 일이라며 짐짓 외면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Being Mortal’이라는 원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의학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지 저자는 묻는다.

게다가 그 싸움에서 우리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


육체가 파괴되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마지막에는 가족과 작별의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채 차가운 병실에서 외로이 죽어 간다.

그 모든 것을 희생한 대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개월에서 1~2년 정도의 형편없이 질 낮은 생명 연장 정도에 불과하다.'

저자가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노년의 삶의 질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죽음을 유예시키는 데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마무리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노인들 거의 모두가 노년기도 평소 살아온 익숙한 공간인 내 집에서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갖고 자율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너싱홈이나 요양원은 내 집이 아니라 병원시설의 일종으로 규정에 따라 동시에 먹고 자야 하므로, 자유로운 개인생활이 존중받을 수도 없고 그 무엇이건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다.

현재 건강상태와 체력을 믿고 암만 큰소리쳐봐도 세월 이길 장사 없다고, 누구 건 더 이상 혼자 설 수 없어 다른 무언가에 의존해야 하는 순간이 대부분 찾아온다.

육체와 정신이 점차적으로 쇠락해 가면서 무너져 내리면 더는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현대 의학과 보건 체계는 이 문제를 두 가지 방향으로 해결해 왔다.


하나는 ‘요양원 nursing home’이라는 보호 시설을 만들어 노인들을 안전하게 수용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년에 직면하는 각종 질병들을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데 집중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는 예외 없이 인공호흡기, 영양공급관, 심폐소생술, 기계장비가 줄줄 연결된 중환자실이 종착지가 된다.

오늘날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들이 흔히 겪게 되는 참담한 모습이다.


숨이 붙어있는 시간을 얼마 더 유예시키고자 어느 누구인들 그 잔인하고 힘든 싸움을 계속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실제로 의료진이 환자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고통을 줄이고, 삶의 품위를 유지하고, 다 끝내지 못한 자잘한 일들을 마저 처리하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 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친다고 한다.

만약 생명을 연장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일상의 가치들을 실현하고 싶기 때문일 뿐이다.  


-앨리스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병원 환자복을 입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또한 요양원 직원들이 정해 주는 아무 하고나 같은 방을 써야 했다. 할머니의 생각과 관계없이 선택된 룸메이트들이 여러 명 거쳐 갔다. 모두 인지 능력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조용했고, 어떤 사람은 밤에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할머니는 감금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 것만 같았다. - 본문 119쪽  

-윌슨이 열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니 제시가 심한 뇌졸중을 겪었다. 당시 제시의 나이는 쉰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다. 뇌졸중으로 그녀는 몸 한쪽이 완전히 마비돼서 걷거나 서지 못했으며, 팔도 들 수가 없었다. 혼자서는 씻을 수도, 요리를 할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빨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학에 다니던 윌슨은 전혀 수입이 없었고, 좁은 아파트를 룸메이트와 함께 쓰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머니를 돌볼 길이 없었다. 어머니를 맡길 곳은 요양원밖에 없었다. 윌슨은 자기 대학 근처에 있는 곳을 골랐다. 안전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을 볼 때마다 끊임없이 요구했다. “나를 제발 집에 데려가 줘.”  -본문 142쪽

저자는 책 말미에 아버지의 임종에 대해서 써 내려간다.

부모님이 둘 다 의사이고 본인도 의사임에도 보호자 입장에서 경험하는 죽음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된다는 점이다.

척수암에 걸려 시간이 지날수록 나빠지는 아버지의 상태와 그걸 지켜보는 의사인 아들.

마지막으로 의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손주들이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거기에 없었고, 대신 아이패드에 있는 사진을 보여 드렸다.

아버지는 눈을 크게 뜨고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모든 사진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아버지는 다시 무의식으로 빠져들었다. 호흡이 한 번에 20~30초씩 멈추는 일이 반복됐다. 이제 끝인가 하면 호흡이 다시 시작되곤 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오후 6시 10분쯤 결국 마지막 순간이 왔다. 나는 아버지의 호흡이 이전보다 더 오래 멈춰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가 멈춘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 본문 393쪽  

저자는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해야 한다.

끝까지 질병과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며 치료에 매달리는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될 숙명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을지 알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제도를 예로 들며, 요양원(nursing home),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 호스피스 케어(hospice care), 종말기 케어(end-of-life care)등을 통해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삶을 누리다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여러 갈래 길을 안내한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자기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들에 둘러싸여 살다 떠나기를 원하지만 현실적 제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전제는, 안타깝지만 각자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선택돼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웹에서 다운 받은 여덟 장의 문서를 빠짐없이 체크, 사인해 놓고 동갑내기 우리 부부는 각자 증인으로 서명 주고받았으며 대리인은 가까이 사는 딸을 세우고 공증까지 마쳤다.


꼭 해둬야 할 큰 일 하나를 마무리지어 아주 개운했다.


그 서류는 미국에서 2016년에 마무리 지어 설합에 잘 보관해 뒀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마침 2018년부터  웰다잉법이 시행된다는 말을 들었다.


현재는 별다른 지병 없이 활기차게 잘 지내고 있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미리미리 사전의료의향서(Advance directive)를 작성해 두기로 했다.  


자신이 어련히 알아서 할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없노라고 아들은 말렸지만, 아무리 이성적인 의사일지라도 부모 일이라면 최종 선택이나 결정 시 가슴 왼편이 저릿 거릴 터.


병원에 문의해 보니 미국과 달리 서류를 작성할 필요도, 공증을 거칠 일도 없이 아주  간단했다.


서귀포 국민건강보험공단을 방문해 신분증 확인 후, 수월하게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해 놨다.


컴퓨터로 작성된 의향서는 정보시스템에 일괄 등록돼 자동으로 개인의료정보에 통합되는 체제였다. 


주민증 비슷한 등록증이 며칠뒤 집으로 송부되었다.


백세시대라 하나 나이 들어갈수록 사는 날까지 건강하게 지내다가 평화로이 고종명 하길 소망한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건강, 사대육신 오장육부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기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미리 스스로 알아서 걸음 멈출 준비를 해두는 게 옳은 일이다.


生이 있은즉 死는 필연이기 때문이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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