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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l 22. 2024

그리운 나라

고향 쪽으로부터 시집 한 권이 왔다. 수건 목에 걸치고 콩밭머리에 앉아서 나직나직 나누는 얘기처럼 편한 시, 술술 읽히는 시였다. 난해한 비유나 상징으로 도배시킨 시, 말재주나 일삼는 형이상학적인 시가 난무하는 시대. 시란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고 감동의 대상이라 했던가. 그가 펼쳐낸 일상 시는 잔잔한 물결 되어 심곡에 파문을 일으켰다.



소학교만 마치고 땅에 엎드려 살다 보니 영농후계자가 되어, 지금은 대농으로 허허 옛말 하며 사는 당숙 얼굴 같은 시인의 모습. 국어사전에도 오르지 않은 단어인 게국지의 맛을 그와 내가 알기에 동질의 유대감을 갖는가. 정겨운 충청도 사투리, 우리끼리야 잘 통하는 탑새기며 순앵이를 참으로 오랜만에 발음해 보니 감회가 유다르다. 괜스레 눈자위가 뜨거워진다. 아마도 모처럼 젖어본 고향의 향훈이 그윽해서이리라.



그리운 나라, 돌아가고 싶은 나라. 아아! 그의 시집에는 고스란히 그 나라가 담겨 있었다. 그의 시는 오래 잊고 살았던 유년의 풍경들을 하나씩 되살아나게 해 주었다. 순수하고 질박해서 마냥 아름다운 풍경, 오십 년대를 수놓은 여름의 추억들이 흑백필름 되어 두서없이 떠오른다.  

 

당진 읍내에 본가가 있었지만, 삼십 리나 더 들어간 시골 외가에서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어촌이자 농촌이며 신촌이기도 했던 대호지란 곳이 외가 마을이었다. 등잔불을 쓰고 버스를 타려면 시오리 길을 걸어 나가야 하는 한촌, 지금은 대호 방조제가 들어서 앞자락 바다가 질펀한 간척지 논으로 변했지만, 당시는 인천 가는 배편이 닿던 곳이다.



외숙모 몰래 동네 처자들 따라 바다에 가면 흥미진진한 세상이 거기 펼쳐져 있었다. 능쟁이 황바리 버글대던 썰물 진 갯벌. 땡볕 마다하지 않고 쑥쑥 발목 빠지며 바지락 캐고 고동 줍다 덤으로 주꾸미라도 구럭에 담는 날, 으레 옷이야 후지르게 마련이었다. 방죽 가생이에서 벌건 낯 식혀가며 뻘흙 대충 자리 잡고는 살금살금 들어서던 사립. 낮잠 늘어지게 자다 슬쩍 눈뜬 누렁이만 꼬리 살랑거렸다.



바다뿐인가. 조무래기들을 심심하게 내버려 두지 않기로는 산과 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름 해 짧도록 산야를 쏘다니며 이미 세어버린 삐삐를 한 줌씩 뽑고 길섶에 주저앉아 풀각시를 만들었다. 뻐꾸기 소리 노곤히 풀려 날 즈음이면 뒤란 뜨물 자배기에 담가둔 풋감도 달았으며 울 밖 옥수수는 통통하게 알이 배어갔다. 고구마 밭에 지천인 까마중 따먹어 입가를 퍼렇게 물들이고는 개똥참외 덩굴을 들춰 보던 아이들. 엄지손가락만큼 자란 텃밭의 오이며 가지에도 눈독을 들였으니 요즘 같은 간식거리가 없어도 내도록 주전부리는 달고 살았다.



장광 옆 상사화 늘씬하게 꽃대 올리는 여름. 그늘막 밀대 방석 한편에서 외숙모는 쪄온 삼 껍질을 벗겼고 나는 속살 흰 겨릅대 끄트머리 둥글려 잠자리 채 만들어 거미줄 걷고 다니느라 분다웠다. 논고랑 쫄쫄쫄 물꼬를 따라 버들잎 배 띄우고 놀다 뱀을 만나 질겁한 적도 있었다. 매미소리 자지러지는 밤나무에 올랐다가 벌에 쏘이고 말잠자리 잡으려다 부들 우거진 늪에 빠져 허부 댄 일이며, 허연 방울 보글보글 오르는 오줌통에 엎어진 기억은 아마도 헛간 옆에서 방아깨비 쫓다가 그랬으리라. 봇도랑에 얼게미 받치고 풀섶 훑어 붕어를 잡고 소류지에선 소금쟁이 방개와 친구하던 그때. 머리 쫑쫑 땋아 댕기들인 다음 곱게 놀아라, 당부하신 외숙모 말씀을 금세 잊게 하는 놀잇감은 사방에 널려 있었으니.



망개 잎 오그려 받아 마시던 바위틈 석간수의 시원함 만이랴. 모든 게 달기만 하던 그 시절, 못 먹어서도 아니었다. 후사가 없던 외숙 댁은 방앗간을 운영해 생질녀만큼이야 사철 쌀밥에 계란 톡 깨 넣거나 하다못해 왜간장에 참기름 넣고 비벼 늘 고신 내를 풍기게 했으니까. 당시 대부분은 애 어른 할 것 없이 베 보자기 덮어둔 보리밥 시렁에서 꺼내 후드득 물 말아먹으면 그만이던 세월이었다. 깡된장에 상추쌈이거나 풋고추만 있어도 찬밥 더운밥 안 가렸다. 하물며 열무김치 노각 무침 오이냉국 곁들이면 그야말로 성찬. 무짠지 머위 잎이 입맛 돋우는가 하면 땀방울 떨구며 먹는 밀국수엔 송송 썬 애호박 푸르고 햇감자 달큰했다.



겉보릿가루를 당원 물에 타 마시던 시절 얘기다. 이즈음 먹거리에도 복고풍이 유행이라 신토불이 웰빙 자연식에 섬유질 식품이 대접받아 뜨고 있으니 격세지감이 든달까. 누구네 논에는 어느새 벼가 패었다느니, 누구네 집 돼지가 새끼를 몇 마리 낳았다느니 하는 게 화젯거리인 평온한 마을. 꼬끼오 닭소리에 아침이 열리던 당시라 조기교육 열풍은 물론 환경공해 따위 알지도 못했다. 그저 자연의 순리대로 너나없이 순박하게 살았던 사람들. 다만 자식농사에는 욕심이 커 아낌없이 뒷바라지들을 했다. 마치 그것만이 삶의 목적이자 가치이듯이.



아이들이야 장날 쌀금이 무슨 상관이며 소판 돈이 얼마인들 대수랴. 그저 들강아지되어 뛰놀기에 바빴다. 놀기도 고단해 저녁밥 먹기 바쁘게 곯아떨어지기 예사. 뿐인가, 술빵에 취해서 빵을 입에 문 채로 잠에 빠지는 아이도 있었다. 먼 데서 우렛소리 울리고 이어서 소나기 한줄금 들이치면 마루에 배 깔고 어슴푸레 드는 낮잠이야 사실 꿀맛이었고. 한숨 자고 부스스 일어나 눈 비비다가도 피사리하고 온 행랑아범 장딴지에서 떼낸 거머리 모아 댓진 침주기에 신바람 올랐다.



동네가 한바탕 왁자한 날은 둠벙 물 퍼내고 미꾸리 붕어 양동이로 주워 담느라 부산스러웠다. 임시로 공터에 건 솥에선 김이 오르고 둘러앉은 두레반 위에는 집집에서 추렴한 음식들, 쓱쓱 치댄 겉절이에 부침개며 막걸리가 푸짐했다. 대지를 한껏 달군 폭염이 수그러들 무렵, 시퍼런 논배미에서 처량스럽게 뜸부기 소리 이어졌으며 악머구리 떼 지어 밤새울 채비를 서둘렀다. 반딧불이 두엄가를 유영하는 여름밤. 독 오른 쑥대를 쳐다 모깃불 놓으면 매캐한 연기는 하늘까지 닿았다. 베 홑이불 감고 살평상에 누워 바라본 밤하늘. 총총한 별 무리 사이로 미리내는 안개처럼 보얗게 흘러갔다.



아득해서 그리운, 갈 수 없어 더 가고 싶은 그 나라. 이미 먼 먼 옛이야기되어 아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는데, 고향의 시인으로 하여 잠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그 시절 그 기억들. 바로 얼마 전 같건만 허나 벌써 오래전 시간. 나 또한 어느 결에 지나간 추억들을 그리워하는 나이가 되었다. -1989-





*쫑배기: 초고추장이나 간장 등을 담는 조그만 사기그릇

*게국지: 호박지와 같이 뚝배기에 끓여 먹는 충청도식 토속김치

*순앵이: 식물의 어린 순

*탑새기: 솜털이나 보리꺼럭 같이 아주 작은 입자로 된 먼지

*거릅대: 껍질을 벗긴 삼대, 삼 줄기

*시렁: 긴 나무를 가로질러 선반처럼 만든 것

*댓진: 담뱃대 안에 낀 독한 담배의 진으로 뱀도 죽는다

*능쟁이, 황발이: 서해안 갯벌에서 사는 식용 게 종류

*둠벙: 작은 연못

*쌀금: 쌀값, 쌀 가격

*장광: 장독대

*봇도랑: 봇물을 대거나 빼게 만든 도랑

*구럭: 수확물을 담기 위해 어깨에 멜 수 있게 짚으로 엮어 짠 망태기

*가생이: 변두리, 주변

*방죽: 저수지보다 작은 규모의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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