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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7. 2024

비양도 최상의 비경을 보려면

호니토와 하얀 등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앞머리에는 모자 그림이 나온다.

중절모 같지만 그러나 모자가 아니란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란다.

처음 본 비양도는 어린 왕자의 그 그림을 연상시켰다.

바다 빛이 비색 (翡色)인 금능이나 협재해변에서  빤히 건너다 보이는 섬이다.

금능에서 보면 봉우리가 둘 선명하나 협재에선 한 덩어리가 된 섬.

저 섬에 한번은 꼭 가봐야지, 별러온 비양도다.

하늘 푸르고 바람 고요해 서귀포 앞바다가 빙판처럼 매끄러운 날.

여유롭게 한림항으로 향했다.

왕복표를 끊어 오후 한 시 반 배로 비양도에 들어갔다.

물살 가르며 시원하게 달리던 배는 십여 분 만에 비양도 선착장에 닿았다.

막 배인 세시 반 배를 놓치면 안 된다고 내리는데 선장이 거푸 주의를 줬다.

 


오늘 아침, 말 그대로 정녕 명주바다였다.


그처럼 아침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은빛 쟁반 같은 서귀포 앞바다에 사뿐 사려 앉은 섶섬.


기상하자마자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그간 별러왔던 비양도행 배를 타기로 했다.


한림까지 가려면 버스로 두 시간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부지런을 떨었다.


쾌청하고 바람 고요한 이런 날씨야말로 섬에 들어가기 안성맞춤.


휴일이기도 하지만 사람 마음은 엇비슷한지라 섬에 들어가려는 대기자가 많았다.


한시 반 배에 올랐는데 십여 분 만에 비양도 선착장에 닿았다.


안내 지도를 훑어본 다음 비양도 오름부터 걸어보기로 했다.


정상에서 뱃길 인도하는 새하얀 비양등대가 희망봉처럼 손짓해서였다.




쪽빛 하늘, 눈이 시리다.


갈대 나부끼는 오름 들머리.


높이 114미터라 가벼운 코스인데도 배에 동승했던 이들 모두는 해변길로 사라졌다.


혼자 온 여학생만 산길 앞장섰다.


봉긋 나지막하게 솟은 동산인데도 계단 경사도가 제법이었다.


그래도 한번씩 뒤돌아서서 하계 바다 풍경에 매료된 채 숨결 가다듬어 가쁘지는 않았다.


초반에서 잠깐 긴장시킨 층계 길 서너 번 오르자 파란 하늘 문이 열리며 부드러운 흙길이 전개됐다.


곧이어 양옆으로 이어진 키 큰 시누대 터널길이야말로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여기서부터가 모름지기 이 오름의 백미라 할만했다.


잠시만에 벗어나 아쉽게 만드는 '반짝 비경'이 아니라 초록 터널은 연달아 나타났다.


처음 이 길을 설계한 누군가의 높은 안목에 박수 보내고 싶었다.


시누대길이 끝나자 저 상층부로 이어진 마지막 언덕길이 가느다랗게 드러났다.


고지가 바로 저기, 불현듯 푸른 힘이 솟구쳤다.


보드라운 흙길을 뛰다시피 신나게 걸었다.


어느새 하얀 등대가 기다리는 조붓한 정상에 이르렀다.




등대 턱 앞에 바짝 다가가 벽에 붙은 푯말을 보니 최초 점등일이 1955년 9월 1일이다.


섬 속의 섬인 데다 산꼭대기에 저만한 위용의 등대를 세우자면 공사기간도 꽤 소요됐으렷다.


당시 한국의 정세는 삼 년여에 걸친 6.25 사변을 겪으며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무척 힘든 때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맺었으니 정국 안정이나 겨우 됐을까 말까 한 시기.


제주섬 자체만 하더라도 4·3 사건이 마무리된 지 고작 1년 뒤, 아직 뒤숭숭한 세상이었다.


당장 배곯는 이들이 숱했던 어려운 상황임에도 나라 최남단의 조그만 섬 형편까지 아우른 정부의 공적은 왜 잊혔지?


착잡한 심사로 그래도 사방을 두루 조망하노라니 차오르는 희열감, 이래저래 울컥해질 판이다.


울멍줄멍 오름이 빚어낸 푸르스름한 능선의 아름다움.


신창 바닷가 바람개비가 일렬로 서있고 금능과 협재 해수욕장 은모랫벌도 선연했다.


한림항 주변에 뜬 선박들은 청푸른 바다 위에서 뱃놀이하는 듯 한가로웠다.


다만 한라산이 육안으로는 잡히는데 사진으론 글쎄다? 싶게 희미하다.


동쪽 멀리 모슬봉과 송악산 그 아래 바다는 은빛 윤슬로 아이스링크 같다.


발밑에 펼쳐진 바다는 지중해처럼 깊은 푸르름이다.


아기자기한 서쪽 바다야 예쁘기로 소문난 곳.


오래 여기 머물고 싶지만 이 섬에서 허락된 시간은 고작 두 시간뿐이다.


심호흡으로 가급적 맑은 대기 가슴 가득 담고는 하산을 시작했다.


주르륵, 내려가는 길은 조심하긴 해야 하나 체력 소비가 적어 훨씬 수월하다.


날머리 층계에 이르자 그 옆은 바로 까만 화산석 뒤덮인 바다였다.


섬 한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삼십여 분이면 충분하니 여유가 넉넉하다.


이제 호니토로 이름난 코끼리바위를 만나러 갈 차례다.




비양도(飛揚島)는 타원형의 감자같이 생긴 섬이다.

전체를 둘러보는데 두 시간이면 넉넉할 정도로 자그마하다.

섬 중앙에는 비양봉이 자리 잡았으며 정상에 하얀 등대가 서있다.

등대까지 올라갔다 와도 별로 어렵지 않게 한 시간 미만이면 너끈히 다녀온다.

시야가 탁 트인 날은 한라산이 선명히 보인다는데 이날은 형체 흐릿했지만 건너다보는 한림 협재 멀리 송악산 전망은 근사했다.

도로 반반히 닦여있었으나 차는 다니지 않고 더러 자전거 탄 젊은이들이 해안 일주도로를 달렸다.

검은 현무암이 깔린 해변, 갈대 어느새 세어 가고 해국 연보라 꽃만큼이나 잎새 모양도 송이송이 꽃 같다.

여기에도 선인장 무리 지어 자라고 염생식물인 해홍나물 비슷한 식물이 군락 이뤄 붉게 퍼져있었다.

식물 이름을 물어볼래도 섬 주민이 얼마 안 되니 돌아다니는 이가 없어 사진만 찍어뒀다.

서해안 갯벌엔 별사탕 매단듯한 나문재며 함초라 불리는 퉁퉁마디 칠면초 해홍나물이 지천인데 바위에 뿌리내린 쟤는 뭐지?

해안 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기암괴석들이 주변에 여기저기 널려있는데 '애기 업은 돌'과 '코끼리 바위'가 그럴싸하다.

바다에 코를 박고 주저앉은 늙은 코끼리 모양의 바위, 애기 업은 돌은 천연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된 호니토(Hornito)라고.

호니토란 화산쇄설물이 분출구 주변에 급경사로 쌓인 소규모 화산체를 이른단다.

아래 펄랑못은 우리나라 유일의 염습지로 밀물 때는 해수가 밀려들고 썰물이 되면 다시 담수호가 되는 얕고 길쭘한 못이다.  


물비늘 은빛으로 빛나는 못가에 마침 실한 번행초가 보이기에 차가 없는 깨끗한 환경이라 한 움큼 따왔다.

원체 걸음이 빠르기도 하거니와 서둘러 다녀서인지 배 시간보다 십여 분 미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사파이어, 에메랄드, 비취, 아콰마린, 토파즈,  터키석, 인근 바닷물이 보석 깔아놓은 듯 새삼 눈부셨다.

처음엔 그저 일별하고 지나친 필름 형태의 포토존 눈여겨보니 봄날이라는 드라마 촬영지였다는 설명이 따른다.

그 바람에 이 섬이 어느 날부터 자고 나니 유명해졌더라나.

보건지소 건물이며 카페며 식당 모두가 조그만 데다 몇 채 슬라브 주택도 삼 칸 누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해서 정겹기도 하지만 밤이 되어 건너편 한림만 해도 대도시같이 불 휘황하게 밝힐 텐데 고적하지나 않을지.

특히 폭풍우 사납게 몰아쳐 파도 아우성치는 밤이면... 섬을 떠나는 마음 괜히 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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