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r 16. 2024

파도에 파도가 더해지는 가파도

청보리밭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아침잠이 많다고 여겼는데 일찍 잠을 자니 일찍 일어나게 되더라는.

여명에서부터 일출을 지켜보면서 오늘은 날씨 매우 청명하리라 짐작됐다.

일기예보 역시 해는 쨍쨍, 미세먼지도 적은데 다만 기온이 7도~ 17도로 낮았다.

마침 오늘부터 청보리 축제도 열리겠다, 행선지는 당연히 가파도다.

현관을 여니 한라산 골짜기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보였다.

옆집에 전화를 걸었다.

원래 새벽 기도를 바치는 그녀인지라 이른 기상이 습관화돼 있다.

가파도 가보자는 제안에 선뜻 오케이, 여간해서 노땡큐라 답하지 않는 그녀다.

마음이 없으면 선약이 있다거나 몸이 안 좋다, 같은 이유를 들기도 할 텐데 이심전심 통하는 데가 있어 그 점 고맙다.

후다닥 준비를 한 다음 일찌감치 우리는 운진항에 도착했다.

배편 예약을 하지 않았으니 오늘 같은 날 표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승선 신고서를 기재한 뒤 아홉 시에 승선권을 구입했으나 우리가 탈 수 있는 여객선은 11시.

기다리는 시간에 모살개 포구 쪽을 걷기로 했다.

송악산 한라산이 훤히 보이는 들판까지 나갔다가 깨끗하고 연한 쑥을 만났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말처럼 배 시간이 될 때까지 쑥 본 김에 쑥개떡 만들 쑥을 뜯었다.

둘이 뜯으니 잠깐 동안에 제법 많은 쑥을 장만할 수 있었다.




11시 정각 여객선 블루레이호는 운진항을 출발했다.

푸른 가오리라?

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 20미터를 넘지 않는 섬인 데다 생김새가 넓적한 가오리 형상인 섬 가파도.

가오리를 제주에선 가파리라 부르기에 가파도일까, 푸른 파도에 청보리 맥파까지 더해져 가파도일까.

한국 내에서만이 아니라 아시아 권에서도 유인도 중에 가장 낮은 섬이란다.

영조 때 제주목사가 소 방목 허가를 내주면서 목동이 들어왔다고도 하고 1842년 이후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는 섬.

그러나 선사시대 유적인 고인돌로 미루어 역사 자못 아득하다는데.

허나 고인돌이란 게 아리송한 것이, 왕돌 무더기 내지는 선 돌 누운 돌 뿐이라 고개 갸우뚱해진다.

송악산에서 내려다보면 금세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릴 듯 얇으레 한 가파도는 사월이면 청보리 축제로 붐빈다.

지금이 바로 그 축제 시즌이다.

관광객들은 배를 타고 꾸역꾸역 가파도로 들어왔다.

우리도 그들 중 하나였다.




송악산 또는 군산 정상에서 건너다보면 바다에 떠있는 널빤지 쪽처럼 보이는 섬.

최고 해발 고도가 20m라니 그럴 법도 하다.

창파 거친 날은 물보라에 싸여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 듯 야트막 납작한 섬.

가오리가 양 날개 하느작거리며 대양을 헤엄치듯 한 형상을 한 가파도.

가파도는 제주섬과 마라도 사이에 널펀펀한 징검돌처럼 살푼 끼여있다.

주말이라서일까.

꾸역꾸역 타고 내리는 수많은 관광객을 보며 가파도가 자칫 가라앉겠네, 실없는 농을 다 할 정도였다.


육지에서 마주 보이는 거리라 금세 가파도에 닿았다.

바람이 별로 없어 배를 타기엔 더없이 좋은 날씨였으파도 너울 치듯 출렁대는 청보리 이삭 초록 물결은 비교적 얌전했다.

그 대신 한창인 유채꽃과 청보리의 보색대비 선명한 유화 캔버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검은 돌로 쌓아 올린 밭담 경계는 그린& 옐로가 빚어내는 하모니 한층 격을 높여주었고.

자그마한 섬을 한 바퀴 느릿느릿 걸으며 한껏 누렸던 여유로움.

보리밭 사잇길 걷기도 하고 동네 골목길이며 해안길 걸으면서는

햇볕에 널어 거풍 쐬는 이부자리 솜처럼 복닥하니 부풀어 오르던 마음자리.

더러는 따스하게 데워진 바윗전에 앉아 바다 멍울 때리면서 눈 지그시 감아보기도 하였다.

가파도에서의 한나절 우리 입에서는 자연스레 '아아, 평화롭다'라는 말이 거푸 흘러나왔다.

아마도 천국의 평화가 분명 이러하리.

둘레가 4킬로미터 남짓이라는 섬에서 10킬로나 걸었다니 종횡무진 다 돌아본 셈.

동행한 이웃지기와 주거니 받거니 서로 스냅사진도 담아가면서.

모슬포 운진항에서 여객선을 타면 가파도까지는 십 분이면 닿는다.




왁자지껄 떠들썩할 거라 생각한 가파도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첫날이라서인지 본격적인 축제 분위기는 채 무르익지 않았다.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좋았다.

날씨는 쾌청, 짙푸른 물빛에 대기 맑아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은 물론 서귀포시 일원이 한눈에 들었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서인가, 예년에 비해 청보리나 유채 농사는 좀 허술한 편.

그래도 여행객들은 흔치 않은 보리밭에, 선명한 한라산 자태에 탄성 보내며 사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두 시간에 걸쳐 작은 섬을 지그재그로 돌아다녔다.

오후 들자 거센 해풍이 사방에서 마구 불어 제켰다.

그 덕에 보리밭둑에 앉아 쉬며 맥파는 맘껏 감상할 수 있었다.

백여 세대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마을 안.

초록지붕 파랑지붕 주황지붕 둘러쓴 납작한 기와집 산뜻한 풍경 이뤘다.

가파 초등학교에 보건 진료소 치안센터 의용소방대도 있으며 교회와 보리 도정공장도 자리 잡았다.

등대, 풍차며 소망 전망대와 동네 골목길은 청보리밭과 함께 핫스팟이다.

섬을 한바퀴 돌고 상동과 하동 두 마을을 다 둘러봐도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대여 자전거를 타면 그마저 바짝 단축된다.

알록달록 동화 같은 동네 벽화 구경하며 한갓지게 걸어서 가파도 선착장에 이르니 터미널 앞에서 버스킹 공연 중.

청년 둘이 열창하는 노랫소리가 세차게 불어대는 해풍에 속절없이 흩날렸다.

돌아오는 뱃길, 선체가 좌우로 기웃대며 뱃전까지 파도가 튀어 올라 선실로 들어갔다.

종일 찬 바람에 후드껴 맞아서인지 무척 노곤했다.

차에 올라서는 내동 자다 깨다 하다 보니 어느새 서귀포 구터미널에 이르렀다.


*여객선을 타려면 주민등록증 지참은 필수다.

작가의 이전글 천년 숲 비자림의 가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