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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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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Sep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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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걷는 게 기적이 아니라 지금 걸을 수 있는 게 기적이라 하였다.
기적은 위대하고 놀랍고 신비하고 희귀한 신의 힘이나 초자연적인 특별한 현상만일까.
아닐 것이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크게 기지개를 켤 수 있다는 그 자체.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살듯 오늘 이렇게 숨 쉬고 살아있는 평범한 이 일 자체가 분명 기적이다.
단단한 씨앗이 흙에 묻혀 움트고 자라나 꽃피고 열매 맺는 흔하디 흔한 일도 깊이 보면 기적이다.
확률상으로 3억 분의 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을 통과해 이 세상에 태어난 우리는 저마다 존재만으로도 눈부신 기적의 상징체.
그리하여 태양 아래 반짝대는 나뭇잎을 보면서 청량한 새소리 들으며 맑은 바람결 느끼고 은은한 꽃 향기 맡을 수 있는 이 하루를 선물해 주신 하늘에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음이 바로 기적 같은 일이다.
오늘은 누군가가 그렇게도 살고 싶어 한 내일이라 하지 않던가.
힘껏 호흡 들이마시고 내쉴 수 있으며 사대육신 오감이 다 기능을 제대로 해주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기적은 이처럼 아주 예사로이 여겼던 일들이자 미미하고 소소한 일에서 찾을 수 있는 것.
후끈 단 사막이 단비에 적셔진 어느 오후, 뜰에서 풀냄새와 더불어 슬쩍 코티분 내음이 스쳐 지난다.
늦장미 한 송이가 붉던데 그 향기인가 싶어 다가가보니 장미 향은 코티분보다는 좀 더 강한 편.
후각을 풀가동해 천천히 향방을 좇는다.
등나무 그늘에서 건만 그래도 무성한 분꽃 몇 포기가 보였다.
짙은 푸르름 새새로 분꽃이 피어있고 향은 거기서
스며 나왔다.
워낙 왕성한 생명력이라 아무렇게나 묻어둔 분꽃씨 몇 알, 다행히 등나무 아래라 폭염은 피할 수 있었나 보다.
그렇게 터 잡은 분꽃이 해질녘이면 환하게 피어나지만 조촐하니 촌스러운 꽃이라 환대나 괴임은 받지 못했다.
어쩌다 왕창 부어지는 물바가지 세례만으로도 검푸르게 자리 잡고는 저 혼자 무상심하게 피고 지는 꽃.
사막의 열기를 말없이 견뎌내고 굿굿이 살아남아 그 꽃 저녁마다 호젓이 피고 짐도 어쩐지 기적 같다.
너도 기적이야, 혼잣소리를 하며 처음으로 폰을 꽃잎에 들이밀자니 왠지 미안하고 열쩍기조차 하다.
나날의 자잔한 일상사에 감사하기는커녕 심드렁한 채로 무언가 굉장한 것, 특별난 것, 색다른 것만 좇느라 거의 본체만체 무시하다시피 한 분꽃이다.
어릴 적 참 흔하게 보아온 소박한 꽃, 박꽃과 함께 저물녘이면 피어나는 그 무렵이 저녁밥 짓는 때라며 부엌으로 들어가던 엄마를 생각나게 하는 꽃.
엊그제 일요일, 천우신조란 표현이 걸맞을 만한 일이 있었다.
딸내미는 LA 시민들의 북한산 격인
볼디로 등산을 갔다.
하산 길에 늘 가던 트레일 대신 다른 곳으로 접어들었다가 낯선 계곡에서 헤매는 중에 비까지 오고..
팔월 캘리에 내리는
비야 고대하고 고대하던 단비 중의 단비이지만 한편 사고 나기 딱 좋은 국지성 소낙비다.
이러다 조난당하나 보다 완전 멘붕이 왔었는데 천만다행, 등산객 목소리를 듣고 가까스로 그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길은 찾아들었으나 빗발 굵어지며 점점 집중폭우 되어 쏟아지는 비에 옷은 엉망이 됐다.
도로에 검붉은 토사는 흘러내리고 바윗돌 와르르 떨어지는 등 거의 아수라장 상태에 이르렀다.
난장판이 된 산을
허둥지둥 간신히 헤치고 내려와 차 타고 볼디 주차장을 떠난 게 4시 18분.
다섯 시
에 볼디 올라가는 도로초입이 완전통제되어 약간만 늦었어도 고립무원, 헬기 뜰 판이었다고.
더 놀랍기로는 이튿날 월요일 뉴스가 전한 사고 소식이었다.
전날 황급히 떠났던 볼디 바로 그
주차장 아랫녘에서 불어난 물길에 휩쓸려 차 채 개울로 떠내려가 숨진 한인이 있었으니 사고가 난 시각이 4시 반 경.
사바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어쩌고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기적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는 게 기적 아니겠나.
이처럼 간발의 차이로 생사가
갈라지게 되는 상황을 접하자 기적 속에 살아가는 존재임을 거듭 실감케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나도 동행했을 터인데 그날따라 급우가
컴퓨터 도움이 필요해 오기로 해서 불가피하게 집에 묶여있었다
만일 내가 갔더라면 빗길에 미끄럼 사고도 사고지만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보다 움직임이 더뎠을 터라 시간 허비했을 수도.
그러면 하산 시간 역시 지체될 뻔했으니 자칫 큰일을 당할 수도 있었겠다 싶어 아찔했다.
네 잎짜
리 클로버를 찾다가 비행기를 놓쳐 사고를 모면했느니, 클로버를 찾느라 고개를 숙인 덕에 저격범의 총알을 피할 수 있었느니 하며, 뜻밖의 행운을 네 잎 클로버와 결부시키듯 이번은 나도 급우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비로 인해 무산된 손님 약속이지만 어쨌든 그로써 집에 머물러 있었던 거라 생각사록 감사하기만 한 일.
딸내미는 천만다행히 무사귀환했으나 순식간에 변을 당한
이름 모를 교민분을
추모하며 손을 모았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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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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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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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 지나니 만사 여유작작, 편안해서 좋다. 걷고 또 걸어다니며 바람 스치고 풀꽃 만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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