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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날에

by 무량화 Sep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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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기운이 소슬히 스미는 아침 여섯 시... 희뿜하니 동이 튼다.

현관문을 열자 청량한 대기가 밀려들어오며 건너편으로 금빛 해 머리가 살짝 드러난다.

한길에 나서니 맞은편 서녘 하늘엔 한가위 지난 하얀 달이 아직도 둥두렷이 떠있다.

새벽 미사 중 911을 추모하는 강론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길.

천천히 서북쪽으로 흘러가는 저 달은 점점 이지러져 마침내 서늘한 그믐달이 되었다가
다시 초승달에서 만월로 차오르리라.

열 시쯤이 되자 푸른 하늘로 스며든 듯 하이얀 달은 차츰 스러져 흔적조차 지워졌다.



십 년 전, 구월 이맘때 메모다.

맨해튼이 빤히 건너다 보이는 바오로 수도원.

사위는 고요하고 고목의 짙은 그림자 길게 늘어섰다.

찹찹한 강바람이 여민 옷깃을 흔들며 지나갔다.

홀로 분다운 다람쥐, 참나무 가지를 넘나드는 정원에 철이른 낙엽이 휘날렸다.

피에타 상이 모셔진 기도실에 이르니 수많은 촛불의 온기로 한기가 가신다.

발자취에도 흔들리는 바람결 따라서 촛불이 일렁거렸다.

참배객들의 조심스러운 움직임 외에는 밀밀하게 드리워진 적요.

간절한 염원을 글로 올린 기도문과 빼곡히 사연 담은 편지들 옆에는 사진이 촘촘 붙어있다.

2977명의 사망자 중 이 수도원과 인연이 닿아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졸업가운을 입고 수줍게 웃는 앳된 남자


두 아이를 품에 안고 활짝 웃는 여자

소방차 문을 잡고서 폼을 잡은 씩씩한 남자

웨이브 진 금발이 풍성하니 아름다운 여자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있는 남자

성조기 앞에서 근엄한 표정인 남자

소방관 제복이 아주 잘 어울리는 남자

환하게 미소 띤 여자의 명함판 사진도 있으며

행복한 젊은 부부의 결혼사진도 있다.



그들은 모두  911 당시 무역 센터 빌딩에서 졸지에 변을 당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은 근무처가 그곳이어서, 또는 소방관으로 임무 수행 중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로 이 수도원 내 성당에 다니던 교우들이었다고.

맨해튼이 지척 거리이니 이곳에 연고를 둔 희생자가 무척 많았다고 한다.

뉴욕에서 미증유의 참사가 일어난 그날 이


이 수도원의 피에타 상 앞에는 비탄에 잠긴 가족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의 사진을 붙이기 시작했고 그리움 담은 편지를 올리기도 했더란다.

특별한 날이면 찾아와 헌화를 하고 촛불을 켜고 그들은 속으로 속으로만 슬픔을 삭혀갔으니....

그중 한 편지를 눈으로 읽는다.

날짜는 2002년 9.11이라 되어있다.

그러니까 일 주기에 올린 편지겠다.


"우리 가정으로부터 그는 영원히 떠났다

그러나 결코 우리 마음으로부터는 떠나지 않았다.(마음이란 단어 아래 밑줄이 두 번 그어졌다)

우리는 그를 영원토록 사랑한다.

보고 싶다, 마이크."

소방관 제복 속 마이크라는 늠름한 청년의 사진 옆에 쓰인 <22 세>.

그 부분이 특히 콧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먹먹하니 목이 잠긴다.

아직은 홍안인 고작 스물두 살, 너무도 아까운 나이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애통한 죽음도 허다하다는 데에 이르면 그저 망연해질 따름이다.

도무지 무엇이 인간의 목숨 그 가치보다 더 소중한가.


이념, 종교, 사상이 무어란 말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어찌 이리 잔악하고 가혹한 짓거리를 할 수 있는가.

그것도 열심히 살아가는 생활인일 따름인 무고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는 동명소설을 각색하여 2011년에 개봉한 영화다.


911이 선량하고 따뜻한 아빠 톰 행크스를 앗아간다.


평소 이성적이고 침착한 엄마인 샌드라 블록은 남편과의 마지막 통화 중 오피스에서 뒤를 돌아보는 순간, 테러로 무너져내리는 세계무역센터에 경악한다.


아홉 살 소년 토머스 혼은 자상한 아빠의 영향으로 창의적이고 호기심 넘치는 아이로 성장한다.


그는 졸지에 아빠를 잃게 되고 아빠의 마지막 전화를 받지 못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자책에 빠져 우울감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어느 날, 아빠의 유품 속에 있던 열쇠를 발견하고는 열쇠의 비밀을 풀고자 날마다 뉴욕 곳곳을 누빈다.


소년은 테러의 공포감에 갇혀 엘리베이터도, 대중교통도 두려워 이용하지 못하므로 오로지 걸어서 대도시 골목골목을 탐색해 나간다.


지도, 방독면, 쌍안경, 카메라가 든 배낭을 메고 한 손에 탬버린을 든 채로.


거기서 저마다 슬픔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게 되고 비로소 불통과 부재와 상실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마침내 치유에 이르게 되는 오스카.




오스카뿐인가.


바오로 수도원 마이크의 부모 그 품에 피 흘리며 축 늘어진 아들을 안게 한 자 그 누구인가.

가슴에 묻게 한 자 그 누구인가.

인간임이 부끄럽던 911 그날 벌어진, 참담함을 넘어 가공스러운 비극.


촛불 하나 제단에 올린 다음 잠시 묵념드리고 묵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이 불그레한 하늘에 그날도 하얀 달이 허공에 걸려있었다.

달처럼 우리도 이울었다 다시금 차오를 수 있을까, 정녕 그럴 수 있을까. 2012


https://brunch.co.kr/@muryanghwa/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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