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흘러가는 게 세월뿐이랴

by 무량화

흐르는 것이 구름뿐이랴. 강물뿐이랴. 세월뿐이랴. 나 또한 흐른다.

응당 그런 줄만 알았다.

강물 흐르듯 흐르는 세월 속을 나 역시 흘러가고 있다고 여겨왔다.

아니었다. 흘러간 것은 내가 아니었다. 다만 시간이었다.

먼 이역땅 타국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무연히, 흐르는 세월의 강둑 위에 망연히 서있었을 따름이었다.



벌써 여러 해째다. 나는 철새도 텃새도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날개 반쯤만 접고 언제라도 날으리라, 어정쩡하게 외다리로 서서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살아왔다.

그렇게 허술하니 탕진해 버린 어제, 무의미하게 낭비하고 있는 오늘.

쭉정이 시간들이 모여 어느새 오 년 넘은 객지살이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란 말은 유행가의 객쩍은 수사에 불과한가.

장승처럼 붙박인 양 한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뿌리내릴 법도 한데, 가지 벌어 봄 직도 한데.




그간 다람쥐 쳇바퀴 돌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마냥 제자리 뛰기만 했다.

아무것도 변화된 것 없고 나아진 것 없는 늘 같은 일상의 연속.

매양 그게 그 타령인 판박이 시간, 따분하게 반복되는 나날의 단조로운 되풀이에 차츰 지쳐갔다.

재미가 없어지며 진도 빠졌다. 갑갑하다 못해 턱턱 숨이 막혔다.

정형화된 하루하루를 나는 몹시도 지겨워하고 있었다. 질식할 거 같은 일상이었다.

틉틉한 늪 속 같은 시간에 침몰되어 가는 중 마침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농장에 같이 갑시다~맞다! 블루베리 철이 시작되는 뉴저지의 칠월도 깊어간다.

우리는 의기투합, 블루베리 농장으로 일상을 접어둔 채 잠시 탈출했다.


붉디붉은 라즈베리와 함께 한창 블루베리 익어가는 여름이다.

고인 것 쏟아내기엔 최고의 처방전인 수다를 마구 떨며 짙어가는 녹음 거느린 채 농장길로 들어선다.

약간 구름이 끼고 바람 살랑거리는 날씨라 블루베리 따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다.

지평선 저 멀리까지 자우룩이 펼쳐진 블루베리 나무들.


열매를 딸 채비부터 제대로 갖춘다.

모자를 쓰고 허리춤에는 고정시켜 묶은 양철통, 이 안에 열매가 수북 차면 양동이에 붓는다.

한 손엔 양동이를 들고 남은 손으론 북 치는 소년처럼 퉁퉁 양철통을 두드리면서 밭으로 들어간다.

그 바람에 단 열매 속에 파묻혀있던 새떼가 놀라 풍선 오르듯 일제히 하늘로 뜬다.


열을 지어 가지런히 서있는 블루베리 나무의 키는 어깨짬에 이른다.

허리를 굽히거나 팔을 뻗쳐 올리지 않고도 편한 자세로 열매를 딸 수 있도록 블루베리 나무는 선선히 앙가슴을 열어준다.

짙은 검보랏빛 작은 열매를 한 움큼 털어 넣으면 입안에서 바로 으깨지며 목을 타고 넘어가는 달콤하니 부드러운 즙.

양동이가 어느 정도 차오르니 그제서야 이웃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새하얗게 피어난 개망초 무리, 펜스에 만개한 부켄벨리아꽃, 불그레한 해당화 열매까지 지난해하고 영판 닮은 꼴,

시나브로 지기 시작하는 나리꽃 칙칙한 상태까지 모든 게 똑같다.



문득 아뜩해진다. 그새 또 일 년 세월이 흘러갔구나.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선 채 나이테 하나 더 두른 것 말고는 그대로인데 다시 한 해가 가버렸구나.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세월, 황망하다. 비단 블루베리 앞에서 뿐인가.

덤덤히 지나치지 못하고 고개를 절래 흔들기도 하다가 주억거리기도 한 게 여러 수차례다.

올 들어 특히 또렷또렷 잡히는 시간의 물살, 아니 벌써 철이 이렇게 됐다니...

카메라를 줄창 지니다 보니 더 선연하게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이른 봄 수선화를 보며 아! 어느새 수선화, 했다가 아! 찔레꽃, 했다가 아! 목백일홍, 하며 짧은 탄성 내지르다가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을 것이다.

요지부동인 위치에서 그러기 벌써 여러 해째라는 데 생각이 미치니 등이 후끈 단다.

사계의 순환은 한치도 궤도를 이탈하지 않을뿐더러 게으름 부리거나 섣불리 나대지도 않는다.

차근차근 줄을 지어 수수만년 언제나 봄이 가면 여름 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천천히 도는 줄 알았는데 후다닥 한 바퀴를 돈 세월,

어느새 여름 무르녹아, 지난해 그맘때에 이르렀다니.

흐름이 급한 물살을 내려다보는 듯, 빙빙 도는 회전목마를 바라보는 듯 어질어질하다.

울렁증이 인다. 멀미감도 든다. 스탑! 할 수만 있다면 잠시 멈추게 하고 싶다.

아니 그보다는 그냥 따라 흐르자. 구름처럼 강물처럼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자.

그 수밖에 없는 노릇이잖는가, 혼잣소리하며 구구로 나이 든 티를 내야 해? 우격다짐으로 추스르는 자신.

급류 되어 흐르는 세월의 속도감에 기죽어 오늘은 괜히 투정 부리고 싶었나 보다.


무심코 채운 양동이를 들어보니 무게가 제법 나간다.

해마다 30파운드, 깨끗하게 휑궈 물 빼서 냉동실에 넣어두고 일 년 내내 우유와 바나나 곁들여 믹서기에 돌려 먹은 지 여러 해째.


거진 목표량이 채워진 블루베리를 저울에 올리며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꺼냈다. 2006

사진 : 픽사베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