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 봉긋한 동산이 앉아 있었다. 다복솔 제법 어우러져 호젓한 숲을 이뤘고 봄이면 뻐꾹새 소리도 들리는 산이었다. 뿐 아니라 약수터가 있는 산기슭은 인근 주민들의 새벽 산책길이 되었으며 그 무렵 체조하는 모습들이 우리 집 동창을 통해 보이기도 했다.
금빛 찬연히 누리를 밝히며 솟는 아침 해를 맞음도 좋지만 산 위에 둥두렷 떠오르는 보름달은 맑은 물에 헹궈 올린 듯 소소(昭昭)했다. 비라도 내리는 날의 숲은 안개에 싸여 신비롭기조차 했으며 늦가을 수척해진 숲으로 계절의 변화를 짐작할 수도 있었다. 그 산자락을 온통 덮은 개나리는 노란 꽃과 함께 여름날의 짙푸른 녹음 덤불이 시야를 무척 시원하게 해 주었다. 신록의 오월이면 아카시아 향이 우리 뜨락까지도 달큰히 적시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불도저가 폭군처럼 거침없이 산을 깎기 시작했다. 둔탁한 기계의 소음 아래 숲은 무참히 유린당하고 동산은 며칠 새에 황토 흙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택지가 조성되자 마치 점령군의 깃발이듯 위풍도 당당히 무슨 아파트 단지라는 커다란 팻말이 꽂히고 곧이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포클레인이 흙을 한입씩 물었다 놓으며 땅 고르기 바쁘고 황토 먼지 날리는 덤프트럭은 쉼 없이 오르내렸다. 철제가 이리저리 얽히고 레미콘이 빙빙 돌아가더니 쉽게도 집 모양은 잡혀갔다.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빠른 진척을 보이며 아파트는 날이 다르게 쑥쑥 올라갔다. 위대한 메커니즘. 그 틈의 인부들은 토용(土湧)처럼 작게 보였고 무언가를 지시하는 노란 모자만이 선명하게 눈에 띄었다. 창천으로 스며들듯 현기증 나는 높이의 고층 아파트가 외장공사를 마치고 드디어 중후하고도 세련된 위용을 과시하며 새 주인을 기다렸다. 그와 동시에 조용한 주택지였던 우리 동네에도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쓸만한 점포나 하다못해 큰 길가 차고까지 이름도 묵직한 중개사 사무실이 곳곳에 들어섰다. 곧이어 홈 인테리어, 고급 가구점, 병원, 이런저런 학원들, 거기에 카페까지 하나둘 간판을 올렸다. 그리고 인사동 거리나 되듯 골동품점의 숫자가 불어난 것도 이때를 즈음해서였다. 풍경소리, 古典, 청산, 藝 등의 멋스럽고 고풍스러운 이름과 함께.
하여 나는 달 뜨는 산을 잃은 대신 새로운 즐거움 하나를 보탤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요즘 같은 날씨, 청추의 소슬한 오후녘에 나는 즐겨 그 거리로 발길 옮긴다. 골동품에 대해 특별한 안목이 있다거나 조예가 깊은 바 아니지만 그네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고 편안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그들이 내게 건네주는 나직한 감동의 파장, 그것은 봄비이듯 촉촉이 적셔오는 순일한 정감이다.
골동품점이라 하지만 이곳에는 대체로 옛 가구류가 주종을 이루고 고서화나 자기보다는 민예품들이 많은 편이다. 오랜 세월 등잔불 그을음에 실컷 찌든 우중충한 빛깔의 고가구. 거기 구색을 맞추듯 손때에 절은 투박진 생활 용구들. 한때 지난 시대의 볼품없는 유물로 천대받아 광 속에 처박혔거나 품이 격하된 채 허드레로 쓰이던 그들. 귀신 붙은 물건인 양 께름히 여기고 하잘것없는 고물단지라고 내침을 당하기도 하던 그들이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십여 년 안팎의 일이다.
매끄러운 현대 문명에 식상한 사람들이 골동품이 지닌 자연에 가까운 소박함과 진솔함에 이끌리는 것일까. 더불어 옛것에 대한 향수와 점차 잃어 가는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때문일까. 청자병이며 신라 와당을 사서 소장해 두고 매만질 여유까지는 없다 해도 보는 순간만은 온전한 내 것으로 갖가지 사념과 추억을 긷곤 하므로 나는 자주 그곳을 찾는 것이리라.
입구에 섰는 장명등(長明燈)이나 석탑에서는 퇴락한 산사 풍경이 연상된다. 묵직한 석 조각 해태상도 있고 보살상도 앉아있다. 거친 도끼 자국 아직도 그대로인 소 구유에서는 토방 가득 햇살 모이던 외가가 생각켜진다. 초동(樵童)의 등에 업혀 한 짐 나뭇단 사이에 때로는 진달래도 꽂았을 지게. 고달픔과 시름을 함께 간 맷돌이며 긴긴밤 한을 엮어 짜던 베틀도 거기엔 있었다. 참나무 숯에 벌겋게 단 채 푸새한 무명을 다림질하던 손다리미는 의외로 시계가 째깍거리며 초침이 도는 재치를 보인다.
바삭바삭한 산자도 담아 봤을 나무 함지나 쿵더쿵 돌절구는 잘 꾸며진 거실에서 테이블이 되기도 한다는 요즘. 거기에 부초 띄워 몇 마리 물고기도 노닐게 한다는데. 오밀조밀한 떡살이며 다식판이 참기름에 절은 고운 무늬를 띠고 있어서 나는 솜씨 좋던 대고모 얼굴을 게서 보았다. 매일을 일속에 사시던 외숙모, 그분이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건 푸른 녹이 슨 청동화로 앞에서였다. 삭풍 몰아치는 겨울밤, 인두로 모양을 잡으며 겹저고리가 지어졌고 그 틈틈이 언 홍시도 녹여 주시던 외숙모.
너부죽한 나무 다듬잇돌에서는 밤 깊도록 푸새질하던 엄마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아한 다듬이질 소리는 한여름 쏟아지듯 울어대는 개구리소리처럼 귀청 말갛게 때렸다. 떡메를 보니 마당에 차일이 쳐지고 높이 괸 큰 상에 ‘祝壽宴’ 이란 글자가 또렷하던 할아버지 회갑연이 눈앞을 스친다. 50년대이던 그때 갈래머리 쫑쫑 딴 사진 속의 어린 나는 살푼 눈을 감고 찍혔었지.
그리고 또 있었다. 볼수록 나를 매혹시키던 용목 조각 삼층장. 십장생 중 우주의 근본인 천(天) 지(地) 수(水)에 조화 이룬 거북, 사슴, 학. 그들은 우리 선조들이 즐겨 다룬 소재로 청청함과 고고함을 상징하는 영물들이다. 윗 단의 조각은 학 한 마리 백운 거느린 채 막 비상하는 몸짓이고 중간에는 사슴이 노송 비낀 청산 벗 삼아 뛰놀고 있다. 맨 아랫단에는 거북이 창파 위에 유유히 노니는 품 古談하면서도 한껏 운치로웠다. 거기다 그 조각의 정교함은 얼마나 대단하던가.
값이 엄청나던 삼층장은 내 선망의 시선을 한껏 받으며 오연한 자세로 한자리를 지켰는데 문득 보니 그게 사라졌다. 자주 눈에 익은 물건이 제 있을 곳에 없으면 마치 아끼던 소장품을 누군가에게 내준 양 서운한 마음까지 든다. 그러면서 새로이 와 자리 잡은 것과 익숙해지고 친해지자면 몇몇 번의 교감이 오간 후에야 가능하다. 그래도 어느 건 여전히 생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느 건 금방 정 도타이 드는 것도 있긴 하다. 오늘 새로이 대하게 된 민화 한 점처럼.
익살스런 표정이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단옷날의 풍속도. 치졸의 티를 못 벗은 솜씨이지만 일일이 개성 있는 얼굴 모습이 살아 숨 쉰다. 이 역시 보는 걸로 만족하고 눈만 호강시키는 게 아니라 마음까지 잠시나마 사치를 누려본다. 그리고 기원하는 것이다. 여태껏 내가 욕심내던 그 삼층장. 부디 살가운 주인 만나 호두기름 먹인 애정 깃든 손길 자주 받으며 오래오래 머물라고. 또한 조각의 의미처럼 그 집에 상서로운 기운 가득 넘치게 하라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만났다 헤어지는 무수한 것들. 그리고 지는 낙엽의 속뜻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만추다.《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