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처음 중국 땅에 닿아 제일 먼저 내가 본 것은 오성홍기의 펄럭임이었다. 응당 첫눈에 뜨인 것은 사람이나 건물이었음직한데 아니었다. 사회주의 표상이자 그 정신이 압축된 붉은색과의 첫 대면. 그것은 호기심이나 기대에 앞서 나를 약간은 긴장시켰다. 체제의 이질감 때문이리라. 북경 여행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도 그 느낌은 여전스러웠다.
여하튼 이상한 일이다. 금발을 한 백인들이 사는 런던이나 로마에서는 그렇지가 않았다. 나 여기 왔노라, 벅찬 기분으로 와락 그 품에 안긴 것과는 달리 발길이 절로 조심스러웠다. 비행기로 채 두 시간도 걸리지 않는 중국은 얼마나 오래 멀고 서먹한 곳으로 남아있었던가. 거기에도 우리와 닮은, 코 낮고 낮 넙데데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낯익은 버드나무며 포플러에 기와를 인 전각이 그리 생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다 황인종을 뜻하는 노란색의 별이 다섯. 중국 공산당을 가리키는 큰 별 하나에 그를 둘러싼 작은 별 넷은 중국 인민을 지칭한다는 오성홍기다. 유독 눈에 잘 띄는 색깔이라서인가,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인가. 깃폭의 위세에 눌린 양 멈칫, 나는 잠시 긴장감마저 느꼈다. 아니 그것은 조여드는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강파르지 않고 여유로웠다. 이웃을 대하듯 잘 웃고 친절했다. 민족성 자체가 잠시 멈춰 서서 기다릴 줄 알고 조금 물러서서 돌아보는 지혜를 오랜 숨결로 간직한 사람들. 사물을 백 년 단위로 생각하는 중국적 시간 감각에 익숙한 그들이 무엇을 조급하게 서둘 것이며 안달할 것인가. 노장사상이 깊이 밴 데다 불교 정신에 길들여져서인지 그야말로 만만디. 누추한 행색의 삶을 그리 애터지게 여기지도 않고 불편한 일상의 틀조차 별로 괘념치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렇게 길들여진 것일까.
화려한 단청을 품은 기와지붕과 첨단 기법의 고층 빌딩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중국의 심장부 베이징. 고물단지인 차들이 자전거와 무궤열차, 인력거며 이층 버스와 뒤얽혀서 기세 좋게 달리는 거리를 지나 서둘러 찾은 곳은 천안문 광장이다. 중국 현대사를 포괄적으로 수용한 천안문 광장엔 마침 토요일이라서인지 사람들이 꽤 붐빈다. 중국은 지난 95년부터 토. 일 휴무제가 실시되고 있다. 그 덕으로 지방에서도 자금성 구경을 겸해 모택동 기념관에 참배코자 일부러 먼 길 나선 사람들이 많은듯했다.
우리에게도 천안문 사태 때 그 모습이 자주 텔레비전에 비쳐 잘 알려져 있는 대광장. 세계 최대 면적이라는 안내문 그대로 천안문 광장은 황막하도록 너르다. 과연 대륙다운 면모요 그들 다운 구상이다. 광장 중앙의 인민영웅기념비를 빼고는 나무 그늘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사방을 에워싼 건물의 규모가 또 질리게 한다. 아예 가공스럽다. 이건 아니다, 라며 고개 젓게 만든다.
아득히 선 천안문 그리고 인민대회당. 역사박물관과 모 주석 기념관이 제각각 웅자를 뽐내며 오연히 서있다. 제대로 돌아보자면 다리품이 여간 아닐듯해 멀리서 겉만 훑어보고 생략하기로 한다. 시간이 빠듯하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언제든 다시 기회가 오면 역사박물관만은 찬찬히 살펴볼 테다. 동행한 딸 생각도 그러했으나 애초에 계획한 북경유학 뜻을 접게 돼 또 갈 일은 없지 싶다.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자금성을 찾고자 천안문을 향해 똑바로 걸어 나갔다. 그 거리만도 만만치가 않다. 지하도를 통해 다다른 천안문. 시야 가득 압도해 오는 건 웅장한 지붕과 자줏빛 담벼락이다. 다섯 개의 문 중앙에 걸려있는 모택동의 거대한 사진. 그 위에 중국을 상징하는 휘장이 보인다. 문루 좌우에는 아무런 표지도 없는 붉은 깃발이 여러 개 나부끼고 있다. 시뻘건 바탕에 흰색 글씨도 선명히 '세계인민대단결만세'라 써진 엄청 큰 현판도 걸렸다. 다른 체제에서 산 우리 눈에는 섬뜩하기만 했다.
'세계는 하나'라는 표현의 중국식 구호건만 느낌은 사뭇 달랐다. 아마도 위협적인 붉은색 때문이리라. 온통 붉은색 천지. 참 질리도록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색깔이다. 투우장의 소만이 아니라 건전한 이성의 젊은이마저 흥분해 야수가 되게 하는 색. 홍위병의 물결이 홀연 떠오른다. 막무가내로 휘몰아치던 붉은 파도의 가공스러운 위력. 많은 사람들이 죽창 아래 쓰러졌고 살기등등하던 홍위병들은 훗날 역사의 심판대에 올라야 했다.
그때의 함성이 스며든 하늘. 그 하늘에 이건 또 무엇인가. 홍갑사 한 필 풀어 허공에 띄운 듯, 아니 저녁노을 한 자락을 옮겨놓은 듯 붉은 물이 번진 하늘. 그것은 무리 져 점점이 나는 고추잠자리 떼였다. 가을의 전령사인 고추잠자리가 어지러이 여름 복판을 누비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만큼 숫자도 엄청나다. 히치콕의 영화 속 가공스러운 새떼며 펄벅의 <대지>에서 마을을 휩쓴 메뚜기 떼처럼 대거 군단을 이룬 채 선회하며 낮게 비행하는 고추잠자리 떼.
유년의 가을 볕살 아래 싸리비 들고 쫓아다니던 그 고추잠자리는 꿈이듯 아른거리는 유혹이었다. 옥수숫대나 토담 위 박 넌출을 자재로이 넘나드는 은빛 나래가 환상적이었으며 벽공 배경 삼은 군무도 신비롭던 고추잠자리. 그러나 천안문에서 본 고추잠자리는 서정적이기보다 서사적이었는가 하면 혁명의 화약 연기를 연상시켰다.
1965년 가을. 한 시대를 장악한 힘의 광기 어린 폭풍우에 휘말린 젊은이들. 문화대혁명의 기치 아래 모택동의 조종으로 홍안의 소년들이 대거 동원됐다. 그들은 낡은 정치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해 무차별 투쟁을 전개했다.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붉은 깃발 휘날리며 질풍노도로 중국 전역을 휩쓸고는 천안문 광장에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한바탕 몰아친 광풍이었다.
모든 혁명이 그러하듯 피는 다시 피를 부르게 마련. 당시의 격랑 사이에서 붉은 피 흘리며 산화한 넋들이 이제 자유로운 영혼 되어 이 하늘을 나는 걸까. 죽어 꽃이 되는 이 누구이고, 새되어 훨훨 나는 이 누구이며 다시 사람 되는 이 누구인가. 전생에서 지은 바대로, 또는 습(習)에 의해, 한(恨)에 따라 잠자리로 화한 이도 있으리. 그 모든 한바탕 소용돌이는 나와 상관없는 일. 천안문은 그런 표정으로 여전히 무뚝뚝하다.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