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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따라 맛 따라

by 무량화

아날로그 감성여행은 남도, 라 했는데 그 전라남도 지방을 여행했다.

부산과는 지리상으로 과히 멀지 않으나 교통편이 상그러운 지역이라 큰 맘 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오래전부터 별러 온 담양 소쇄원 여행인데 때마침 아들이 주말에 시간 내서 앞장서 주겠다기에 따라나섰다.

물론 먼 거리라 부담이 돼서 처음엔 사양했지만 그 차편에 실려가면 해남에서 캠핑 중인 언니네와 길에서 도킹할 수가 있었다.

이미 일 주 전에 땅끝마을 휴양림에서 머물던 언니는 완도 진도 보길도행에 동행하자 꼬드기며 연신 전화를 걸어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상그러운 지역이라 과감히 거절했는데 이참저참 잘 됐지 뭔가.

그렇게 갖게 된 남도 여정이다.

경남 진주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고속도로를 타자 곧장 달려서 담양에 이르렀다.

담양에서 메타세쿼이아 길과 녹죽원 들렀다가 화순 보성을 거쳐 득량 벌교에 닿았다.

길목 좌우로 촉촉한 봄비 덕에 윤기로이 변한 농가 풍경이 차창 가를 스쳤고 보리밭이 묵직하게 출렁거렸다.



서편제와 녹차 다원부터 떠오르는 보성, 그러나 종일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로 일정은 차질을 빚어 득량역으로 직행했다.

득량만은 열 권짜리 소설 태백산맥으로 익숙해진 지명이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전후, 좌익과 우익의 사상과 이념 갈등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대하소설 태백산맥이다.

좌익의 염상진과 우익의 염상구, 여기서 그려진 빨치산과 토벌대 양 진영의 성향은 고스란히 선악 이분법 공식대로다.

인물 설정부터가 좌는 보다 인간적이고 우는 비열의 극을 달리는 악질이다.

쓰라린 과거 해석 면에서 지나치게 편향된 성향을 드러냈기에 한때 이적성 문제로 시비에 휩싸인 소설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시국이 시국인 만치 왜곡된 현대사를 바로잡기 위한 노력에 가산점을 후하게 얹어줄 만 하지만.

더불어 거의 사라져 가다시피 하는 우리말을 보존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역작임에는 틀림없다.

어디까지나 픽션인 소설 태백산맥보다 진작부터 우리는 허구나 가상이 아닌 논픽션 영웅 이순신 장군으로 득량만을 이미 알고 있다.

지명 자체가 식량을 얻었다, 란 뜻이듯.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득량만에서 무기와 병선을 만들고 군량미를 조달해 길게 끌어온 전란을 승리로 마무리 짓게 한 그곳이다.

청년 이순신은 1565년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외동딸인 열아홉 살 방 씨와 혼인을 맺었다.

군수 방진은 조선에서 활을 잘 쏘기로 이름난 무관이었고 이순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처가에서 지내며 무예를 연마했다.

1597년 양력으로 9월 19일, 의금부에서 만신창이가 된 채 풀려난 이순신.

천리 넘는 길을 백의종군하며 바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수군 재건을 위해 장군은 남녘으로 달려왔다.

하룻밤 유한 순천부 낙안읍성을 떠난 이순신은 보성 벌교 땅으로 향해 군량 창고인 조양창을 찾았다.

이순신이 도착했을 때 조양창에는 정적만 깔려있었다.

도착 즉시 이순신은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와 무기고부터 점검했다.

다행히 아직 얼마간의 곡식 가마니가 남아있었기에 서둘러 원근에 파발을 띄워 병사를 모았다.

백의의 순박한 민초들이 장군 휘하에 몰려들었고 득량만을 낀 품 너른 들판은 아주 기름져 양곡을 넉넉하게 제공해 주었다.

조양창이 있었던 뒷산에 시누대가 많았기에 당시 화살을 만드는 데 아주 요긴히 쓰였다.

여기서 장군은 나라를 구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왜적을 물리친 수군재건은 사실상 득량에서 비롯되었다.

뜬금없이 시골 한적한 간이역사인 득량역 인근 벽면에 이순신 장군 그림이 등장하게 된 연유다.




1930년 경전선이 개통되며 운영을 시작한 보성 득량역, 경남 삼랑진 역에서 광주 사이를 잇는데 현재도 무궁화호가 하루 열 번 왕복하는 역이다.

여기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붓으로 써 붙인 열차 시간표와 운임표가 누렇게 변색된 채 붙어있었다.

그런가 하면 역장 유니폼이며 밤을 밝히던 등잔과 남포가 유물이듯 역사 내에 가지런히 진열돼 있다.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제기차기 등 예전 놀이터를 재현시켜 놓은 득량역 구내엔 철이른 마가렛 흰 꽃 나부꼈다.

역전 비좁은 도로변을 따라 뻥튀기 집도 있고 주막에서 막걸리 한 잔을 걸칠 수 있는 곳, 예전 교복을 빌려 입고 추억사진 하나 남길 수도.....

이처럼 희미하게 스러져 가는 과거를 소환해 내는 흥밋거리도 한 블록 정도 자리 잡았다.

빛바랜 추억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곳이라 하나, 전라도에 대한 기억이 전무하다시피 하므로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긴 하다.

그럴지라도 문득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전 정겨운 풍경이 보고 싶다면 한 번쯤은 보성 득량역에 들러봄직은 하겠다.

요즘은 득량만 낙조와 득량만을 가득 채운 갯벌에서 나오는 참꼬막으로 더 알려진 이름이긴 하지만.

60년대 거리 풍경과 문화재청에서 운영하는 보성여관 사진에 담은 뒤, 태백산맥 문학관은 표지석만 일별하고는 시간 관계상 식당으로 직행했다.


저녁을 먹으려 들른 벌교라 거하게 식사를 하려면 짬이 없기도 해 문학 기행 1번지라는 벌교이나 대충 패스하기로.

돈 자랑 말고 주먹 자랑도 말라는 벌교는 의리의 주먹패라지만 폭력은 폭력. 의리 어쩌고 해싸도 역시 촘촘 들어선 꼬막정식 식당의 꼬막 맛으로나 기억하고 싶다.

산행을 즐기는 아들이 남도 쪽에 갈 적마다 들린다는 국일 식당 꼬막정식.

푸짐한 상차림이 정갈하고 맛도 깔끔해 여행객 누구라도 만족스럴 수준이었다.


비 내리는 득량역사에서 조인한 언니 형부, 처음부터 동행한 사돈에 사돈까지 모두 입 떡 벌어지게 한 근사 뻑적지근한 상차림은 오래 회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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