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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 해장국이 땡기던 날
by
무량화
Sep 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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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쪽에 볼일이 있어 한라산을 넘어갔다.
일찌감치 일을 처리하고 나자 남은 시간 어딜 다녀올까 내심 궁리 부산스러웠다.
흐린 날씨라 우산까지 준비했으나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러나 먹장구름이 떼거리로 휙휙 몰려다녔다.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잠깐 스쳤다.
조반 전이란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걸림 없이 자유로운 생활이란 일면 불규칙한 일상에 다름 아닌 삶.
그런만치 스스로를 규제하면서 관리를 잘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는 등, 아무런 통제나 간섭이 없으니 멋대로다.
매 끼니마다 식단 신경을 써가며 자신을 대접해 주면 좋으련만 게으른 사람답게 대충 한 끼 때우기 일쑤다.
소홀한
식사
로 인한 영양 불균혈,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오래전 이민 초기 일이다.
당시는 열 시간 넘도록 가게를 돌봐야 했는데 잠깐 현기증이 일어나기에 겁이 나 딸에게 증세를 얘기했다.
우선 가까이 있는 한식당에 가서 선짓국부터 사 먹으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비위론 선지 해장국 같은 걸 먹어낼 수가 없었다.
딸내미 왈, 음식이 아닌 약 먹는다 생각하고 일단 잡수란다.
어느 지혜로운 젊은 엄마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났다.
철분은 물론이고 단백질과 비타민, 칼슘, 칼륨
등이 풍부하게 든 영양 덩어리 선지라
아이들이 먹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그녀는 자녀들에게 어릴 적부터 선짓국을
익숙한
먹거리로 받아들이게
했는데, 아이들이 처음엔 잘 먹어낼 리 없기에 발상의 전환을 꾀했다.
"두부 중에도 이건 붉은색 두부야, 자 먹어봐." 그렇게 하여 아무 거부감 없이 아이들이 선짓국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하였다.
주문한 음식을 한참 들여다만 보다가 후춧가루 듬뿍 친 다음 먹어봤다.
어라? 먹을만하네.
왠지 이상할 거라 지레짐작했던 맛 또는 식감은 선입견일 뿐.
그 경험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생선회도 먹게 됐고 추어탕도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었다.
선지 해장국을 먹고 난 며칠 후 딸내미가 조제한 탕약이 배달되었다.
그 후 무슨 말 끝에 선짓국 먹고 빈혈기가 가셨다는 얘길 아들에게 했더니 좋은 영양주사 얼마든지 있거든요, 주사 맞으세요 그런다.
마치 민간요법에 전적으로 기대는 엄마이듯 답답해하며 떨떠름한 반응이다.
한의와 양의는 동서양 차이만큼이나 의식이며 관점 나아가 치료방식이 이리 크게 차이 진다.
그러나 내 경우는 더디긴 하나 한방이 훨씬 효과적, 일면 확증편향 경향인지 모르겠으나 한약이 잘 맞는 편이다.
암튼 뉴저지에서는 일에 치여 바빠서나 먹는데 소홀했지만 지금은 노느라 바쁜 경우다.
신이 나서 바다로 들로 오름으로 쏘다니며 정신없이 구경에 빠지다 보면 먹는 건 뒷전.
끼니 거르는 버릇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나 할까.
허겁지겁 한꺼번에 몰아먹는 고약한
식
습관도 고쳐야 하는 줄 안다만.
나이 들면 밥심으로 산다는데 이건 아니지, 라는 생각 번번이 들면서도....
관공서 주변이라 깨끗한 전문식당을 쉽게 찾았다.
쥔장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실내도 깔끔했다.
주방에서는 큰 솥에서 뿌연 김이 뭉텅이로
솟아올랐다.
선지 해장국을 시키며 선지를 넉넉히 넣어달란 주문은
후렴구로 따른다.
시장이 반찬이기도 하지만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는 식당인듯 깊은 맛 유달랐다.
정갈한 밑반찬에다
뚝배기 국물 맛은 맑으면서도 아주 진했다.
무엇보다
내용물
이 알찼다.
맛있게
한 그릇 뚝딱하고 나니 비로소 눈이 확 떠지는 거 같았다.
어쩌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순전히 기분학상만은 아닐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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